한전이 지난해 영업적자 32조6034억원을 기록했다고 24일 밝혔다. 이는 우리나라 연간 예산의 5%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액수로, 국내 상장사 역사상 최대 적자였던 2021년 5조8601억원의 5.5배가 넘는 최악의 경영 실적이다.
이날 한전이 밝힌 영업적자 규모는 증권사들이 전망한 예상치(31조4659억원)보다도 1조원 이상 컸다. 분기별로는 4분기에만 영업적자가 10조7670억원을 나타내며 분기 사상 처음으로 적자가 10조원을 웃돌았다. 2021년 2분기 이후 7분기 연속 적자다. 시장에선 한전이 자체적인 재무 개선 노력과 회사채 발행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천문학적인 적자…전년 대비 5.5배 넘어서
전문가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에너지 가격이 고공 행진을 하는 가운데 문재인 정부에서 요금 인상을 억제했던 여파가 한전의 손실 규모를 천문학적으로 키웠다”고 말한다.
지난해 한전의 전기 판매 수익은 15.5% 증가했다. 코로나 엔데믹으로 경제활동이 회복되면서 전기 판매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LNG(액화천연가스)와 석탄을 포함한 국제 연료 가격이 폭등하면서 적자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2021년 t당 73만원이었던 LNG 가격은 지난해 156만원으로 크게 올랐고, 유연탄은 t당 139달러(약 18만원)에서 359달러로 급등했다. 지난 정부에서 인상을 계속 미뤘던 판매 단가를 세 차례(4·7·10월)에 걸쳐 19.3원 인상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발전 회사로부터 kWh(킬로와트시)당 260원 정도에 사서 절반 수준에 밑지고 팔다 보니 판매가 늘수록 손실이 커졌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원전 이용률이 80%대를 회복하면서, 그나마 적자 규모가 줄었다. 전력업계 관계자는 “원전 이용률이 지난 문재인 정부와 같은 70% 수준이었다면 지난해 한전 적자 규모는 4조원 이상 많은 36조원대까지 커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가 기반 요금 원칙 이어가야
한전의 천문학적인 적자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원가에 기반한 요금 원칙을 지키는 것 외에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정부 안팎에서 ‘전기·가스 요금 속도 조절론’이 힘을 얻고 있지만, 요금 인상을 더 늦춰서는 곳곳에서 문제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전기 요금이 현 수준을 유지할 경우 한전의 올해 적자는 2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한다. 한전으로선 이자 비용과 필수 사업을 위한 운영 자금 확보를 위해 대규모 회사채 발행이 불가피한 처지다. 지난해 연간 31조8000억원어치의 회사채를 발행했던 한전은 올 들어 두 달 동안 이미 5조9000억원어치를 발행했다. 이런 추세라면 쏟아지는 한전 회사채 물량 때문에 민간 기업들이 자금 조달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던 지난해와 같은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도 크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한전이 미 증시에도 상장돼 있다는 점에서 요금 인상이 계속 늦어져 실적 악화가 심화하면 해외 투자자와 규제 당국의 문제 제기가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018년 한전이 2080억원 적자를 내자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요금 인상 계획과 폭 등에 대해 한전에 질의를 했다는 것이다. 박종배 건국대 교수는 “요금을 올려 소비를 억제하면서도, 취약 계층에는 효율 향상 설비를 보급해 요금 충격을 최소화하는 이원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실적을 발표한 가스공사도 지난해 민수용 미수금(천연가스 수입 대금 중 요금으로 회수되지 않은 금액)이 8조60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가스공사는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배당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