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로 희망퇴직을 받는 국내기업들이 늘고 있다. 희망퇴직은 업종·규모를 가리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 사진은 점심 시간을 마치고 들어가는 한 금융회사 직원들. /조선일보 DB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해외 기업들이 잇따라 대규모 정리 해고에 나선 가운데 국내에서도 희망퇴직을 받는 기업이 늘고 있다. 재계에서는 내년 경제가 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비핵심 사업 정리와 조직 슬림화에 나서고 있어 희망퇴직 기업은 더 늘 것으로 예상한다. 영세 자영업과 조선(造船)·주물 등 이른바 ‘3D 업종’은 구인난에 시달리지만, 상대적으로 좋은 일자리는 감소하는 것이다.

KB증권은 오는 15일까지 희망퇴직 대상자를 모집 중이다. 희망퇴직 적용 대상자는 1982년 12월 1일 이전 출생한 정규직이다. KB증권 측은 “구조 조정이 아니라 직원 요구에 따른 순수한 의미의 희망퇴직”이라고 강조했지만, 업계에서는 레고랜드발(發) 자금 시장 경색과 경기 침체 우려 등으로 중소형사에 이어 대형사도 인력 감축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앞서 하이투자증권과 다올투자증권이 정직원 대상 희망퇴직을 받았고 케이프투자증권은 업황 부진 여파로 법인부와 리서치사업부를 폐지했다.

은행권에서도 올해 대규모 희망퇴직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 사태 이후 비대면 거래가 일상화되면서 영업점 폐쇄 등으로 인력 수요가 줄어드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NH농협은행과 SH수협은행은 지난달 18~22일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KB국민·신한·우리·하나은행은 내년 초 희망퇴직을 시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카드·현대커머셜은 지난달 초 근속 20년 차 이상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고 우리카드도 희망퇴직 시행을 검토하고 있다.

해운사 HMM은 올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고도 최근 근속 10년 이상 육상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았다. 해운 운임이 35주 연속 하락하고, 하반기 물동량이 급감하며 위기가 감지되자 선제적으로 긴축에 나선 것이다.

희망퇴직은 기업 업종·규모를 가리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 실적 악화를 겪는 가전 양판점 롯데하이마트는 오는 16일까지 희망퇴직 대상자를 모집하고 있다. 10년 차 이상 또는 50세 이상 직원 1300여 명이 대상이다. 업계에서는 “글로벌 경기 침체로 TV·가전제품 수요가 급감했고, 내년에도 이 같은 상황이 달라지기 어려워 보여 희망퇴직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LG전자 베스트샵을 운영하는 하이프라자도 성과 부진자, 고연령자를 대상으로 15일까지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

◇자금줄 마르는 스타트업 업계, 대규모 인력 조정 중

올해 초까지만 해도 투자금이 물밀듯 밀려왔던 국내 스타트업 업계도 잇따라 구조 조정에 착수했다.

지난해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로부터 2000억원을 투자받은 인공지능(AI) 교육 스타트업 뤼이드는 지난 9월 마케팅 부문을 대상으로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대규모 투자 이후 비대해진 회사 경영을 효율화하는 차원에서 진행된 것으로 전해졌다. 네이버가 투자했던 물류 스타트업 두핸즈도 지난 10월 직원 절반 이상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외 대기업이 투자한 유망 스타트업도 혹한기를 맞아 몸집 줄이기에 나선 것이다. 한 핀테크 스타트업 창업자는 “하루는 A업체 출신이 한꺼번에 이력서를 우르르 내고, 다른 날은 또 다른 스타트업 직원들이 이력서를 몰아내기에 확인해봤더니 회사마다 감원 바람이 불고 있더라”고 했다. 벤처캐피털 관계자는 “뚜렷한 수익 모델을 만들기보다 투자금을 바탕으로 이용자 수 늘리기에 주력했던 스타트업들이 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가장 먼저 창업자와 경영진 임금 삭감을 권한 뒤에 그것도 먹히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감원을 권고하고 있다”고 했다.

인력 구조 조정이 거세지자 한편에선 이들을 위한 채용 서비스도 등장했다. 채용 플랫폼 원티드는 지난달 30일 ‘전직 지원 프로그램’을 출시했다. 감원 대상이 된 직원들이 좀 더 빠르게 새 직장을 찾을 수 있도록 면접을 연결해주거나 헤드헌터가 먼저 이들의 이력서를 검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원티드 관계자는 “출시 직후 스타트업들의 관심과 문의가 많다”고 했다.

중소기업도 경기 침체와 금리 인상 여파로 고사 위기에 몰렸다. 비상 경영은 기본이고 인력 감축까지 나선 상황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회원사 410곳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내년도 위기 극복을 위해 10곳 중 6곳이 구조 조정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응답 기업 87.8%가 내년 상황이 올해랑 비슷하거나 더 악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기업 10곳 중 7곳 “내년 채용, 올해보다 축소·중단하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년도 채용 시장은 찬바람이 더욱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고환율·고금리 등 불안한 경제 여건 속에서 희망퇴직 등을 통해 기존 인력도 힘들게 줄이고 있는 마당에 신규 채용 인력 확대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분위기다. 스타트업 구조 조정도 내년 상반기까지 더 심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올 하반기 스타트업 신규 투자가 사실상 씨가 마른 상황인데, 내년 초부터 자금이 바닥나는 스타트업이 우후죽순 생길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채용 사이트 사람인 HR연구소가 최근 기업 390사를 대상으로 내년도 채용 규모를 조사한 결과, 10곳 중 4곳(36.7%)은 “올해보다 채용을 축소하거나 중단할 것”이라고 답했다. 올해와 비슷하다는 기업은 36.4%, 아직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는 기업도 9%에 달했다. 확대할 것이라는 기업은 17.9%에 그쳤다. 채용을 중단·축소한다는 응답은 대기업(47.8%)이 중견기업(40.6%)이나 중소기업(32.8%)보다 더 높아, 대기업 중심의 신규 채용 축소 분위기가 감지됐다.

또 다른 채용 사이트 인크루트가 직장인 120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10명 중 1명(12.2%)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가 “희망퇴직, 권고사직 등 감원 목적의 구조 조정을 현재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조만간 진행 가능성 있다”는 답변은 32.7%, “일부 부문 또는 팀을 통합하거나 인력 재배치 진행(예정)”은 23.3%로 나타났다.

실제로 대규모 투자·채용 계획을 밝혔던 주요 그룹들도 계획을 일부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년 투자를 올해보다 절반 이하로 줄일 계획인 SK하이닉스는 채용 규모 역시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으로 전망됐다. IT 업계 연봉 인상을 주도하며 세 자릿수 채용을 진행했던 네이버와 카카오도 신규 채용에 보수적인 기조로 바뀌었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와 배재현 카카오 부사장은 지난달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채용 증가율이 둔화되고 있다” “채용 속도를 조절 중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김용춘 전경련 고용정책팀장은 “올해는 코로나 특수로 그나마 고용시장이 버텼지만, 내년에는 글로벌 경기 침체 영향이 본격화되면서 채용 시장에도 역대급 한파가 불어닥칠 것으로 보인다”며 “올 연말 상당수 대기업에서 퇴임 임원은 늘어난 반면 신규 임원은 줄었는데, 고용 안정성이 떨어지는 임원들은 내년이 더 좌불안석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