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자정 서울 강남역 사거리. 강남대로에 있는 상가 대부분은 문을 닫아 인적이 거의 없는 시간인데도 건물마다 간판 네온사인, 전광판 같은 거리 조명으로 불야성(不夜城)이었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 한 건물은 출입문이 잠겨 있었지만 건물 벽면에는 A성형외과, B치과, C카페 등 간판 21개의 불이 켜져 있었다. 영업이 끝난 1층 속옷 가게는 실내 조명이 환했고, 미관(美觀)을 위해 설치한 건물 외벽 조명은 색깔을 바꿔가며 2초에 한 번씩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이 건물에서 불 꺼진 간판은 3개뿐이었다.
이날 강남대로 일대 상점은 대부분 영업이 끝났는데도 간판 조명을 켜두고 있었다. 강남역~신논현역 690m 거리 양쪽에 있는 건물 43동을 살펴봤더니 입주 상점의 간판 조명을 모두 끈 곳이 두 곳뿐이었다. 간판 조명을 절반 이상 끈 건물은 7곳이었다. 성형외과·학원·약국 등 상점이 17곳 있는 15층 규모 빌딩에선 간판 33개가 불을 밝혔다. 바로 옆 11층 규모 건물에선 지하 1층 술집만 영업 중인데도 간판 25개 중 17개를 켜두고 있었다. 오후 10시 영업을 끝낸 1층 라인프랜즈 상점을 들여다보니 천장 조명 120여 개를 켜두고 있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인공조명에 의한 오염이 G20(주요 20국) 가운데 이탈리아와 함께 최악으로 나타났다. 각종 네온사인, 상점·빌딩 조명, 디지털 광고판, 가로등 조명이 과도하게 많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길거리 주변에선 에너지가 끊임없이 낭비되고 있다. 자연광이 충분한 대낮에도 복합 쇼핑몰, 서울역, 부산역과 같은 다중 이용 시설 안에선 겹겹이 조명을 켜놓고 있었다. 지방자치단체도 도시 야경을 위해 주요 명소에 경쟁적으로 야간 조명을 설치하고 있다. 상점들이 영업시간 이후 간판, 실외 조명과 가게 안 진열장 조명을 끄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비를 7.6% 줄일 수 있다.
지난 9일 새벽 2시 서울 삼성역 4번 출구 쪽 버스 정류장에 설치된 ‘미세 먼지 프리존’의 실내외 조명과 대형 디지털 광고판은 환히 켜져 있었다. 1시간 가까이 이용자가 없는 미세 먼지 프리존으로 들어가니 버스 노선·도착 안내 모니터는 켜진 채였고, 냉난방 시스템 에어컨에선 뜨거운 바람이 나와 더위를 느낄 정도였다. 서울 강남구가 역삼 지하 보도 125m를 고쳐 조성한 역삼 미세 먼지 프리존 역시 새벽인데도 조명·공기청정기·LED 광고판이 켜져 있고, 뜨거운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는 시간이지만 버스 정류장 광고판은 켜져 있고, 인근에 있는 삼성디지털프라자와 현대차 매장은 실내외 할 것 없이 모든 조명을 켜뒀다. 서울 한남동의 한 외국 가전 브랜드 매장은 실내 조명 일부와 광고용 디스플레이를 밤새 끄지 않았다. 지난 8일 밤 11시 30분 서울 영등포구의 한 주민센터 옆 ‘무인 민원 발급기’ 부스도 밤늦은 시간이지만 실내등이 켜진 채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에어컨에서 선선한 바람이 나왔다.
◇환한 대낮에도 점등 장사, 밤엔 형형색색 조명
지난달 25일 오후 1시 30분쯤 서울 중구 명동 거리. 맑고 밝은 대낮인데도 거리 곳곳 상가는 간판 조명을 켜고 있었다. 한 화장품 가게는 간판 조명과 함께 1~3층 건물 외벽에 실외 조명 40여 개를 켜놨다. 이 가게 직원은 “오전 10시 문을 열면서 불을 켜고 오후 10시 영업 끝나면 끈다”고 했다. 이날 명동 거리 250m 양옆에서 영업 중인 1층 가게 37곳 중 26곳이 대낮인데도 간판 조명이나 실외 조명을 켜놨다. 대낮에도 건물 외벽 전체에 조명, 전광판을 설치한 곳도 많았다. 지난달 20일 오후 2시쯤 서울역은 건물 자체를 유리벽으로 만들어 빛이 잘 들어오는데도 천장에 별도로 수많은 조명을 켜놨다. 서울역 2층에 있는 23매장도 모두 간판 조명을 켜고 영업했다.
밤엔 도심 곳곳에서 미관 때문에 주요 관광 명소, 대표 건축물이나 조형물에 형형색색 야간 조명이 빛을 발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한강 교량 30곳 중 27곳에 경관을 위해 일몰 이후 밤 11시까지 야간 조명을 밝힌다. 서울 반포 세빛섬은 매일 오후 5시 30분부터 오후 11시까지 네 건물에 야간 조명을 켠다.
야간 골프도 유행이다. 지난 5일 저녁 강원 화천군이 운영하는 한 파크 골프장은 밤 9시까지 골프 코스 전체에 불을 밝혔다. 18홀 규모인 이 골프장 고객은 10명 남짓이었다. 골프장 관계자는 “주말 저녁에도 많아야 6팀 정도가 전부”라고 했다. 골프장이 밝을수록 야간 이용자가 많아지기 때문에 골프장들은 더 많은 조명을 설치하고 “우리 골프장이 가장 밝다” “낮과 같이 밝은 곳에서 야간 골프를 즐기라”는 식으로 홍보하고 있다. 한 경기 지역 골프장 관계자는 “마지막 손님이 마지막 홀을 나설 때까지 골프장 전체 불을 끄지 않는다”고 했다.
◇상가 문 닫고 난방하면 에너지 6.8% 절감
9일 저녁 경기도 분당의 한 대형 마트에 있는 수십 미터 길이의 식품·유제품 코너 냉장고는 가림막이 없다. 대부분 마트나 편의점 역시 개방형 냉장고인데 대표적 에너지 낭비 사례로 지적된다. 전국 식품 매장 개방형 냉장고는 50만4323대인데 이를 모두 문형으로 바꾸면 연간 최고 1780GWh(기가와트시)를 줄일 수 있다. 약 48만 가구가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력량이다.
겨울철 개문(開門) 난방, 여름철 개문 냉방도 계속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개문 냉·난방 단속이나 자제 캠페인을 벌여왔지만,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철이 되면 여전히 손님을 끌려고 문을 열어놓고 영업하는 경우가 많다. 산업부 관계자는 “상가 문을 닫고 난방하면 에너지를 6.8% 줄일 수 있다”며 “상점들도 전열기 강도 낮추기, 전열기 사용 1시간 줄이기, LED 조명 교체, 복도에 조명 센서 달기 등 에너지 절약에 동참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