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들이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에 잇따라 뛰어들고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탄소 중립 경영에 더해 신사업 발굴이 목적이다. 그러자 수십년 동안 재활용 사업을 해왔던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이 고물상까지 침범하면 어떡하느냐”고 반발하면서 대·중소기업 간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대기업의 ‘친환경 드라이브’가 의도치 않게 ‘중소기업 먹거리 빼앗기’가 돼버린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동반성장위원회까지 나섰지만 양측 이견은 좁혀지지 않고 있다.
◇폐플라스틱 둘러싼 大·中企 분쟁
동반위는 한국자원순환단체총연맹 등이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에 대기업 진출을 막아달라”며 낸 중소기업 적합업종 신청에 대해 막판 심사를 진행 중이다. 동반위는 최근 조정협의체를 구성, 지난 7일 2차 협의를 진행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대기업은 “하루라도 빨리 폐플라스틱 재활용 산업을 키워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며 상생 협약 체결을 요구하지만, 중소 업체들은 “그간 재활용 산업을 가까스로 지켜온 영세 고물상은 다 망하란 소리냐”며 중기 적합업종 지정을 요구하고 있다.
대기업은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 진출은 전 세계적 추세인 친환경 사업 확대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시멘트 업계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어떻게 하면 탄소 중립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는데, 그때 떠오른 게 폐플라스틱 재활용”이라며 “각 회사의 사업 형태에 맞춰 폐플라스틱을 활용해 원료로 만들거나 공장 가동 등을 위한 연료로 사용하는 사업에 나서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탄소 배출이 많은 석유화학 업계 대기업의 시장 진출이 뚜렷하다. 종합화학 회사인 SK지오센트릭은 폐플라스틱 재활용을 주도하는 세계 최대 규모 도시 유전 기업으로 탈바꿈하겠다며 2025년까지 국내외에 5조원 투자 계획을 밝혔다. LG화학, 롯데케미칼, 효성, GS칼텍스 등 다른 화학·정유 대기업도 관련 사업에 앞다퉈 진출했다. 화학 업계 한 임원은 “시장 자체의 성장 가능성, ESG 경영, 기업 이미지 제고와 같은 다양한 목적에서 폐플라스틱 재활용업은 안 할 이유가 없는 산업이다”라고 했다.
정부도 대기업 진출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환경부는 최근 플라스틱 열분해 산업과 관련해 각종 규제를 풀고 시장을 육성하겠다며 ‘순환경제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규제를 풀어 대기업이 뛰어들 수 있게 되면 낙후된 폐플라스틱 재활용 산업에 대규모 연구개발(R&D)과 시설 투자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영세·중소 업체들은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사업을 하면서 수십년간 근근이 버텨왔는데, 이제 와서 대기업이 친환경 운운하며 대규모 자금을 동원해 시장을 장악하려 한다”고 반발한다. 실제 그동안 폐플라스틱 재활용 산업은 7000여 영세·중소 업체들이 맡아왔다. 대기업이 자본력을 앞세워 군소 업체를 인수하고 관련 사업을 키워나가면 기존 중소 업체들은 생존에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동반위 “이달 중 중재안 마련할 것”
동반위는 이달 중에 중재안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이다.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이 중기 적합업종으로 지정되면 최소 3년간 대기업 진출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대기업은 이렇게 되면 대규모 투자가 늦어져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 확보는 사실상 어렵다고 우려하고 있다.
업계에선 폐플라스틱 재활용 시장이 ‘돈 되는 사업’이 될 가능성이 큰 만큼, 친환경과 중소기업 생존권 사이에서 적절한 합의점을 도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폐플라스틱 수거, 생활폐기물(가정에서 분리 배출하는 플라스틱) 재활용은 중소기업에 맡기고, 대기업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화학적 재활용’에 집중하도록 하자는 상생안이다. 동반위 관계자는 “아직은 대·중소기업 간 이견이 너무 커서 합의안 도출이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산업 특성과 업계 상황을 고려해 이달 중 중재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했다. 컨설팅 업체 삼일PwC에 따르면 전 세계 플라스틱 재활용 시장 규모는 2019년 368억 달러(50조8281억원)에서 2027년 638억 달러(약 88조950억원)까지 확대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