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할 일은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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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박 12일 유럽 출장을 마치고 지난 6월 귀국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출장 소감을 묻는 취재진 질문에 작심한 듯 발언을 쏟아냈다. 이 부회장은 “시장 혼돈과 변화, 불확실성이 많은데 우리가 할 일은 좋은 사람 모셔오고, 조직이 예측할 수 있는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뒤, 기술력의 중요성을 강하게 언급했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반년 만에 떠난 해외 출장길에서 반도체, 배터리, 전장 등 삼성 핵심 사업의 현지 상황을 점검하고, 글로벌 기술 변화 트렌드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는 얘기가 나왔다. 재계 고위 인사는 “이 부회장이 기술을 세 차례나 언급한 것은 삼성만의 차별화된 기술력 확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앞으로 핵심 기술 확보와 인재 영입에 더욱 속도를 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들은 올 상반기에 거둔 ‘역대급 실적’에 걸맞게 연구개발(R&D)과 시설 확충에 막대한 투자를 집행했다. 최근 공개된 삼성전자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반도체와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R&D에 지난해 상반기(10조9941억원)보다 10.8% 늘어난 12조1779억원이 투입됐다. 삼성전자는 지속적인 R&D 투자 확대를 통해 국내 특허 4630건, 미국 특허 4170건 등을 등록하는 가시적 성과를 냈다. SK하이닉스도 올 상반기 R&D에 2조4075억원을 집행했는데, 이는 지난해 상반기보다 4000억원 이상 늘어난 것이다.

반도체 다음으로 우리 산업의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도 R&D에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삼성SDI와 LG에너지솔루션, SK온 등 3사는 상반기에만 1조원에 육박하는 자금을 투입하며 기술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삼성SDI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9% 늘어난 5147억원을 R&D에 투자했는데 이는 매출액의 5.9%에 달한다. 삼성SDI는 또 독일 뮌헨과 미국 보스턴에 잇따라 R&D 연구소를 세우며 글로벌 R&D 역량 강화에 나서고 있다. 글로벌 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는 LG에너지솔루션도 R&D에 3784억원을 투입하며 뒤를 이었다. 전년 동기 대비 증감률은 33.1%로 삼성SDI를 크게 상회했다. SK온도 같은 기간 1040억원을 R&D에 투자했다. 주행거리 극대화와 급속충전 시간 최소화 등 주로 차량용 배터리의 성능 향상을 목적으로 R&D가 이뤄졌다.

주요 대기업 그룹도 R&D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SK그룹은 코로나 팬데믹과 세계 경제 위기 속에서 바이오를 중심으로 R&D 혁신에 나서고 있다. SK케미칼은 프리미엄 백신 개발을 위해 ‘스카이박스(SKYVAX)’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경북 안동에 백신 공장을 설립하면서 백신 연구를 추진한 결과 2016년 세계 최초로 세포 배양으로 4가지 바이러스를 예방하는 독감 백신(스카이셀플루) 개발에 성공했다. SK바이오팜은 2019년 수면 장애 치료 신약 ‘수노시’와 뇌전증 신약 ‘엑스코프리’ 등 신약 2종을 개발해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아냈다. SK 관계자는 “SK의 신약 개발 역사는 최태원 SK 회장,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과 바이오 연구진이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면서 이뤄낸 SK의 대표적 성공 사업”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로보틱스를 비롯한 다양한 미래 신사업과 직·간접적으로 연계해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고도의 AI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케임브리지에 로봇 AI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했다. 현대차와 기아, 현대모비스 등 현대차그룹 3사는 로봇 AI 연구소에 총 4억2400만달러(약 5700억원)를 출자한다. 또 로보틱스 분야에서 AI 역량을 꾸준히 확보해 온 보스턴 다이내믹스도 로봇 AI 연구소에 지분을 투자할 예정이다. 보스턴 다이내믹스는 2021년 6월 현대차그룹에 인수된 미국 로봇 전문 기업이다. 또 미래차 시대를 맞아 소프트웨어(SW) 역량을 신속하게 확보하기 위해 ‘글로벌 SW 센터’ 설립도 추진한다.

롯데그룹도 미래 성장이 기대되는 신사업 기술과 투자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특히 전기차, 자율주행, 도심항공교통(UAM) 등 모빌리티 부문과 지속가능성 부문에 투자하면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