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정유·화학업체들은 코로나 악재 속에서도 지난해 좋은 실적을 거뒀지만, 증시 반응은 미지근하다. 수소 부문 등 탄소 중립으로 가기 위한 신사업들이 성과를 내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사진은 울산 남구 고사동에 있는 SK이노베이션 울산콤플렉스 전경. /SK이노베이션

국내 정유·화학 업체들이 탄소 중립이라는 큰 흐름 속에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지난해 사상 최고 수준의 실적을 냈지만, 주가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미래 성장성에 대한 우려는 커지고 있다. 탄소 중립, 탈(脫) 탄소가 글로벌 산업계의 트렌드로 떠오른 가운데 대표적인 탄화수소인 석유를 재료로 하는 정유·화학업계의 사업 구조가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이 같은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이미지 변신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조경목 SK에너지 사장이 지난 2일 “넷제로 에너지 기업으로 성장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나경수 SK지오센트릭(옛 SK종합화학) 사장은 6일 “2050년 이전까지 탄소 제로를 실현하겠다”고 선언하며 ‘탄소 지우기’에 나섰다. 앞서 에쓰오일은 지난달 모회사인 사우디 아람코와 탈 탄소 벤처 기업에 공동 투자를 하기로 합의했다.

◇실적 최대지만, 찬밥 신세 정유·화학

2012년 수출 1위를 기록한 휘발유 등 석유 제품은 지금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주요 수출품 중 하나다. 국내 정유 기업들의 실적도 2020년 부진에서 극적인 반전을 꾀하며 작년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주가는 전혀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구글·애플 등 테크 기업들의 실적 호조가 미국 증시를 되살린 것과 달리, 정유 업종 상장사인 SK이노베이션과 에쓰오일 주가는 ‘역대급’ 실적 발표 전후로 오히려 하락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지난달 중순 27만원대까지 올랐던 SK이노베이션 주가는 실적 발표 전날인 지난 27일 21만원 수준까지 흘러내렸고, 창사 이래 처음으로 연간 영업이익이 2조원을 넘긴 에쓰오일은 정작 실적 발표 당일인 27일엔 주가가 4.37% 급락했다. 두 회사의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실적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LG화학·LG에너지솔루션(LG엔솔)의 물적 분할과 이어진 LG엔솔 상장을 둘러싼 논란은 정유·화학 업계가 마주한 위기를 그대로 보여줬다. LG엔솔이 LG화학에서 분리돼 상장을 추진하자 LG화학 소액 주주들 사이에서는 ‘껍데기만 LG화학에 남기고 알짜는 LG엔솔로 다 넘어간다’는 불만이 제기됐다. 석유화학을 비롯해 배터리를 제외한 다른 사업은 여전히 LG화학에 남았지만, 미래 성장 동력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작년 1월 100만원을 웃돌았던 LG화학 주가는 LG엔솔이 증시에 데뷔한 지난 27일엔 하루 만에 8.13% 급락하며 61만원까지 떨어졌다. 이후 회복세를 보였지만, 주가 하락을 예상한 공매도 공세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수소 등 신사업은 갈 길 멀어

정유·화학 기업들은 전기차 배터리와 이차전지 소재, 수소 등 신기술·신산업에서 기회를 보고 있다. 하지만 전기차 배터리를 제외하면 당장 구체적인 성과를 얻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배터리 시장도 이미 LG와 SK·삼성SDI 등 ‘빅3′ 업체를 중심으로 생태계가 구축되면서 후발 업체들은 틈새를 찾기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특히 국내 주요 기업들이 미래 먹거리로 삼고 투자를 확대하는 수소 산업은 법·제도가 제때 마련되지 못하면서 산업이 제대로 형성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2019년 정부는 수소 경제 로드맵을 마련했지만, 지난해 말까지 3년간 생산된 수소 승용차는 2만대에 그치면서 올해 달성 목표의 3분의 1도 채우지 못했다. 올해까지 2000대를 제조하겠다고 밝혔던 수소 버스도 아직 129대만 운행 중이다.

우리나라가 상용화에 가장 빠르다는 수소연료전지 시장조차도 한꺼풀 벗겨보면 미국 업체들의 제품과 기술을 들여오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동에서 만든 수소를 전용 선박에 넣어 들여오는 방안도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다. 김지산 키움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정유사들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가운데 화학업종도 생태계 재편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