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은 지난 연말 약 200곳의 국내 주요 기업들을 대상으로 과거 10년 동안 있었던 임원들의 횡령·배임 등 불법행위와 회사에 거액의 손해를 끼친 경영활동에 대한 자료 제출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 연루된 삼성전자, LG화학과의 배터리 소송으로 2조원의 배상금을 물어주게 된 SK이노베이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 중인 최신원 전 회장이 재직했던 SK네트웍스 등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빠짐없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연금은 이들 기업 중 20~30곳을 주주대표소송 대상 후보로 압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SK이노베이션 줄줄이 주주대표소송 걸리나

주주대표소송은 지분 0.01%(상장사) 이상 보유한 주주가 투자 기업의 이사나 감사를 대상으로 잘못된 경영 의사 결정 전반에 대해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이다. 국민연금은 최근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하는 주체를 내부에 설치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로 일원화하는 방안을 2월 중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근로자 추천 3인, 지역가입자 추천 3인, 사용자 추천 3인 등 총 9인으로 구성된 수탁위에서 주주대표소송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국민연금의 수익성을 관리하는 기금운용위원회가 아닌 수탁위가 주주대표소송 여부를 결정하는 칼자루를 쥔 데 대해 벌써부터 긴장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국내 시장에 끼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투자 규모는 지난해 10월 기준 163조8000억원으로 국내 주식시장의 6.7%를 차지한다. 국민연금이 5% 이상을 보유한 상장사는 지난해 말 기준 257사로, 삼성전자·SK텔레콤·현대중공업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은 대부분 포함돼 있다. 이들은 모두 국민연금의 주주대표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0.01% 지분을 6개월만 보유하면 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10대 기업 고위 임원은 “이렇게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국민연금은 기금운용위원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이고, 위원의 40%가 정부 관련 인사일 정도로 정부 입김이 세다”며 “정부가 이러한 국민연금을 앞세워 기업 길들이기에 나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경총·대한상의·중소기업중앙회 등 7개 경제단체가 공동으로 성명을 내고 정부에 국민연금 대표소송 확대 방침을 재검토해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해외는 자국 우선주의 강화하는데, 우리는 연금 앞세워 기업 소송”

재계에서는 국민의 노후 자금을 책임지는 연기금이 자국의 특정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선례를 찾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주대표소송 제도를 갖고 있는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서도 대형 연·기금이 자국 기업에 대해 주주대표소송에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 기업인은 “삼성전자를 상대로 국민연금이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하면 해외에서도 줄소송을 당할 우려가 크다”며 “해외 경쟁 업체들이나 기업 사냥꾼들이 그런 호기를 그냥 넘기겠느냐”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국민연금이 주주대표소송을 하는 것이 국민연금 본연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이 소송을 제기하면 해당 기업의 주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결국 국민연금 수익성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정주 전경련 기업제도팀장은 “정부의 막강한 영향력하에 있는 국민연금이 기업에 대해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우리나라 기업을 관치로 다스리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소송 제기 이전에 국민연금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우선 제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