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갈등도 글로벌 M&A 장애물 - 미·중 대립과 자국 우선주의 확산으로 글로벌 기업 간 대형 인수·합병(M&A)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사진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한 식당의 대형 화면에서 지난 11월 16일 열린 미·중 화상 정상회담 장면을 보여주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SK하이닉스 경영진은 최근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 지난해 10월 미국 인텔의 낸드 사업부를 90억달러(약 10조6700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맺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거래를 종결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수 승인을 받아야 하는 8국 가운데 마지막 남은 중국이 승인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걸림돌이다. 이 계약은 당초 올 연말까지 종결짓는 조건이었다. SK하이닉스는 중국 정부가 연내 승인을 내주지 않으면 거래 무산으로 자칫 조(兆) 단위 위약금을 물게 될 수 있다. SK하이닉스 고위 관계자는 “조만간 중국 정부에서 승인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가 2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SK하이닉스 안팎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글로벌 기업 간 M&A(인수⋅합병)의 장벽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각 기업이 사운(社運)을 걸고 야심 차게 시작한 인수⋅합병에 줄줄이 제동이 걸리는가 하면, 산업 구조 개혁을 위한 합병 작업에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중 갈등 격화와 자국 우선주의 확산으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한다. 기업 간 인수⋅합병에 국제 정치 상황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줄줄이 제동 걸리고 있는 반도체 빅딜

미국의 시스템 반도체 기업 매그나칩반도체는 최근 중국계 사모펀드로의 매각이 결국 무산됐다. 매그나칩은 성명을 통해 와이즈로드캐피털과의 매각 계약이 미국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 승인을 받지 못해 해제됐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매그나칩이 보유한 첨단 디스플레이 구동칩과 자동차용 반도체 기술이 중국에 넘어갈 경우 미국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며 반대해왔다. 2004년 SK하이닉스에서 분사한 매그나칩은 미국 시티그룹 벤처캐피털에 인수되면서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됐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매각할 수 있다.

자국 우선주의에 줄줄이 발목 잡히는 빅딜

낸드플래시 세계 2위와 3위 업체 간 합병으로 주목받고 있는 일본 키옥시아와 미국 웨스턴디지털의 협상도 교착 상태다. 업계에는 중국 정부가 합병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협상 자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미국 반도체 장비회사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는 일본 반도체 기업 고쿠사이일렉트릭을 22억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중국 정부의 심사 지연으로 지난 3월 거래가 무산된 바 있다.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 설계 기업 ARM 인수도 무산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영국 정부와 정치권은 미국 기업이 시스템 반도체 지식재산권에서 압도적인 주도권을 갖게 되는 것을 우려하며, 독점 여부에 대해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제 기업들은 미·중 갈등을 상수로 놓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면서 “특히 반도체 등 첨단 기술 기업에는 안보 이슈와 맞물려 굉장히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조선·항공 산업 재편도 제동

우리나라 기업간 대형 인수⋅합병도 해외 경쟁 당국의 견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당초 올 연말까지 끝낸다는 계획이었지만, 각국 경쟁 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해 아직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특히 일부 국가는 해외 공항 보유 슬롯(이착륙 시간대)을 줄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항공 업계 관계자는 “이 경우 해외 국가의 대형 항공사들이 대한항공 슬롯을 차지할 것”이라며 “해외 국가들이 자국 항공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리하고 비현실적인 조건을 앞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 결합이 지지부진하자, 지난 3분기 기준 부채비율이 4000%에 육박하며 사실상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아시아나항공의 재무 상태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유럽연합 경쟁 당국은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우조선해양 인수⋅합병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유럽연합 경쟁 당국은 내년 1월 20일쯤 최종 결론을 내릴 예정인데, 두 회사가 합병되면 액화천연가스(LNG)선 생산 가능 조선사가 두 회사와 삼성중공업 등 3곳에서 2곳으로 줄어들어, 유럽 선사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미·중 갈등, 글로벌 불신으로 인한 자국우선주의 때문에 앞으로도 글로벌 M&A가 차질을 빚을 것”이라며 “이런 식의 힘겨루기가 계속되면 결국은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