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송윤혜

삼성전자는 올해 글로벌 전략회의를 열지 않기로 했다. 매년 12월 중순 열리는 이 회의는 국내외 임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올해 성과와 내년 경기 전망, 그리고 사업 전략을 공유하는 중요한 자리다. 지난해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도 사상 첫 온라인 회의로 열렸던 터라, 올해는 오프라인으로 개최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지만 아예 건너뛰기로 한 것이다. 새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인 오미크론 확산에 따른 우려가 커지면서 미리 1년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급변하는 환경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 경영진의 판단이다. 10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도 “최근 최고 경영진 회의에서 내년 경영 계획을 검토했는데, 오미크론에 대선까지 겹쳐 대규모 신규 투자를 하기는 힘들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며 “큰 방향만 정해놓고 그때그때 탄력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새해가 한 달도 남지 않았지만, 주요 기업의 절반은 아직도 내년 투자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기업들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확산, 원자재 가격 상승 장기화, 글로벌 공급망 차질 등 경영 불안 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에 섣불리 투자 계획을 확정하기가 힘든 상황이라고 밝혔다.

◇500대 기업 절반, “내년 투자 계획 없거나 못 세웠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여론조사기관 모노리서치를 통해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2년 투자 계획’ 설문조사 결과, 응답 기업의 49.5%가 내년도 투자 계획이 없거나 아직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13일 밝혔다. 한경연은 또 500대 기업의 63.8%가 올 3분기까지 작년 동기 대비 투자 규모를 축소했으며, 내년에도 오미크론 확산 등의 요인으로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기업들은 내년 투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리스크로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생산 비용 부담 증가’(52.9%)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글로벌 공급망 훼손에 따른 생산 차질’(17.6%), ‘미국 금리 인상에 따른 신흥국 금융 불안 우려’(17.6%), ‘가계 부채 등 국내 금융 불안 요인’(17.6%) 등의 순이었다(복수 응답).

국내 30대 제조업 회사를 이끌고 있는 A 부회장은 “기업 임원 생활을 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요즘처럼 투자 계획을 세우는 것이 힘든 적은 없었다”며 “10월에 세웠던 내년 경영 계획은 다시 수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출 상품을 실어나르는 해운 운임은 지난해 대비 3~4배 오른 데다 수출할 배를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기 때문이다. A 부회장은 “최근의 원자재 가격 인상이 내년 영업이익의 10%에 육박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원자재 값 인상·노동규제에 시달리는 기업들

국내 500대 기업들이 체감하는 국내 투자 환경은 100점 만점에 65.7점으로 조사됐다. 100점이라고 답한 기업은 제로(0)였고, 90점이라고 답한 기업도 3%에 불과했다. 기업들은 투자를 위축시키는 요인(복수 응답)으로 ‘고용 및 노동 규제’(35.3%)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지자체의 인허가 심의 규제’(29.4%), ‘환경 규제’(17.6%), ‘신사업에 대한 진입 규제’(11.8%), ‘공장 신·증축 관련 토지 규제’(5.9%) 등의 순이었다.

실제로 창사 이래 첫 국내 공장 파업을 겪고 있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는 내년 투자 계획은커녕 올해 경영 실적 전망치를 낮추기에 급급한 상황이다. 타이어 원자재 가격 인상, 해운 운임 상승, 미국의 반덤핑 관세 등 가뜩이나 어려운 외부 상황에서 임금 협상을 둘러싸고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소속 한국타이어 노조의 대전·금산 공장 총파업이 20일째 계속되고 있다.

건설업계 역시 노동 리스크로 내년 투자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국내 한 대형 건설 회사 사장은 “내년부터 시행되는 중대재해법의 1번 타자가 건설 회사 CEO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투자와 사업을 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대선 후 관련 규제가 완화되기만을 기대하면서 납작 엎드려 눈치만 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