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벤처기업부와 중소기업중앙회·중견기업연합회는 100년 이상 가는 강소 기업을 발굴·육성하자는 취지로 2017년부터 명문 장수 기업을 선정해 오고 있다. 해당 업종에서 45년 이상 사업을 유지한 중소·중견기업 중 일자리 창출과 조세 납부, 사회 공헌 실적을 평가해 선정한다. 올해 선정된 명문 장수 기업을 연속으로 소개한다.
지난 22일 경기도 성남에 있는 스키 장갑 전문 기업인 시즈글로벌 본사. 이곳 2층에 있는 R&D(연구·개발) 센터에 들어서자 사람 키만 한 충격시험기, 절단시험용 기기 등 장갑의 내구성과 강도를 측정하기 위한 시험 장비들이 연구실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장비를 작동해 보던 김주인 회장은 “전 세계 스키 장갑 회사 중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는 곳은 우리뿐”이라며 웃었다.
시즈글로벌은 김 회장이 1970년 서울 명동에서 5명으로 시작한 무역 회사가 출발점이다. 설립 초기에는 서울통상·YH무역 같은 곳에서 만든 가발을 미국에서 수입상을 하던 형에게 납품하는 중계무역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창업 2년 만에 100만달러 수출을 달성할 정도로 사업이 잘됐지만, 국내 가발 사업 자체는 조금씩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1976년 우연히 들른 미국의 한 스키 관련 전시회가 전환점이 됐다. 김 회장은 “새 사업 아이템을 물색하던 중 전시회에서 만난 현지 바이어가 스키 장갑 공급처를 일본에서 옮기려 하는데, 한번 해보라고 먼저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용평스키장이 문을 연 지 1년밖에 안 된 때라 국내에 스키는 생소한 스포츠였다. 김 회장은 “스키 한번 타 본 적이 없었지만,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업은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처음 주문받은 3만 켤레가 염색·치수 불량으로 전량 반품 처리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시즈글로벌이 가발로 번 돈으로 장갑 하다가 다 말아먹고 망하게 됐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김 회장은 “문제 업체로 찍힌 미국 시장은 포기하고 유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독일 스포츠 박람회에 가서 스키 장갑이 걸린 부스마다 찾아다닌 끝에 1000켤레 주문을 받아 겨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사업 초기 실패 경험은 김 회장에게 좋은 밑거름이 됐다. 주문한 색깔이 나올 때까지 수십 번 염색을 하면서 고객의 눈높이를 맞췄다. 시즈글로벌의 품질이 유럽 시장에서 조금씩 소문을 타면서, 때마침 스포츠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던 독일 패션 브랜드 로이시(Reusch)와 거래도 트게 됐다. 김 회장은 “로이시 브랜드가 유럽에서 인지도를 높이면서 우리도 같이 성장했다”고 말했다.
시즈글로벌은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세계 각국으로 진출했다. 중국과 국교를 맺기 전인 1989년부터 광둥성에서 현지 위탁 생산을 시작했고, 스리랑카에도 현지법인을 세워 생산 능력을 확충했다. 김 회장은 “1990년대 들어 스키 장갑 부문에서 세계 시장 1위로 올라선 후, 20년 이상 세계시장에서 점유율 20%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5년 자체 브랜드 루디스를 내놓고, 1997년부터 국가대표 공식 후원사로 스키 장갑을 공급하고 있기도 하다. 시즈글로벌의 지난해 매출은 693억원, 올해는 700억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스키 장갑 시장에서 입지를 굳건히 한 시즈글로벌은 소방방화·안전 장갑 시장에 새롭게 도전하고 있다. 지난해 국내는 물론 미국과 유럽 인증도 획득했다. 김 회장은 “1970년 ‘달러를 번다’는 자부심을 갖고 회사를 세울 때처럼 늘 개발하고, 혁신하면서 세계시장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