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겨냥해 첫 글로벌 공급망 정상회의를 열자, 국내 주요 기업들은 1일 비상 대책 회의를 열었다. 기업들은 미국 정부의 이런 움직임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시나리오별 대응 전략 수립에 종일 분주했다. 중국과 미국은 우리나라 수출·수입에서 각각 1·2위를 차지하는 양대 교역국으로, 우리 기업들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모호한 태도로 서방에서는 한국 기업들의 ‘친중(親中)’ 이미지가 강한 게 사실”이라면서 “이를 만회하기 위해 기업들이 값비싼 생산 비용을 감수하고 미국 투자를 늘려왔는데 앞으로는 이런 부담이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중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나 전전긍긍
포스코, 현대제철 등은 1일 아침부터 내부 회의를 열어 미국과 유럽연합(EU)의 합의 내용을 분석했다. 미국은 EU의 철강·알루미늄 제품 관세 철폐를 결정하고, 제조 과정에서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중국의 저가 철강 생산·수출을 막기 위한 새로운 규제를 만들기로 했다. 철강업계는 “관세 철폐로 EU산 철강 제품이 미국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게 되면, 한국 철강사들이 미국 수출에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현재 한국산 철강 제품에 내린 미국 정부의 수입 물량 할당제(쿼터제)가 폐지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더 큰 우려는 미국의 중국 배제 정책이 한국산 철강 제품 수출에 부메랑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 철강 제품의 미국 수출 규모는 약 200만t으로 중국 수출(540만t), 수입(600만t)의 3분의 1 수준이다. 철강업계 고위 관계자는 “무작정 미국 편에 설 수도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우리의 철강 제품을 중국산 가공이라고 트집 잡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철강, 알루미늄 업계 관계자들은 이날 오후에는 산업부와 민관 합동 긴급 대책 회의도 열었다.
오는 8일까지 미국 정부에 반도체 재고 현황, 고객사 정보, 기술 기밀 등의 내용을 보고해야 하는 삼성전자도 이날 오전부터 대책 회의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 입장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글로벌 공급망 회의에 문재인 대통령까지 초청해, 미국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기가 더 힘들어졌다”며 “미국 정부가 원하는 수준과 삼성이 제공할 수 있는 정보 수준을 서로 맞추기 위해 상당히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올해 미국 수도인 워싱턴DC에 사무소를 개설하는 LG그룹, 최근 미국 투자를 대폭 확대하겠다고 발표한 SK그룹 등 다른 대기업들도 진행 중인 미국·중국 사업 등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 의존도 줄여야
하지만 중국이 우리나라 최대 교역국이라는 점이 우리 기업들로선 큰 딜레마다. 중국에 연간 1300억달러(약 153조원)어치를 수출하고 1000억달러(약 117조원)를 수입하고 있다(2020년 기준). 2위 미국에 비해 배 가까운 규모의 수출·수입액으로, 우리나라 전체 교역 규모에서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핵심 생산·소비 기지다. 게다가 중국은 세계 IT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에서도 핵심 생산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은 세계 최대의 반도체 수입국(작년 3500억달러·412조원)이며, 이 반도체들은 중국에서 제조해 전 세계로 수출하는 스마트폰·노트북·가전제품에 탑재된다.
하지만 미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기 위해선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서서히 줄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베트남으로 생산 기지를 옮긴 것처럼 생산 거점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결과적으로 세계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TF 위원장은 “한국은 자유무역의 큰 수혜 국가 중 하나”라면서 “공급망 재편이 전 세계 경제를 가장 효율적인 상태에서 비효율적인 상태로 바꾸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