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오전 한 10대 그룹은 주요 계열사 최고 경영진 회의를 소집했다. 이날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중대재해처벌법 대책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사업장별 안전 대책 강화 방안에 대한 발표에 이어, 안전사고 발생 시 회사 측의 대응 방안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하지만 법무·노무 담당 임원을 포함해 누구도 대책안을 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이 그룹 임원은 “아무리 안전 조치를 강화해도 산업재해를 100% 막는 건 불가능하지 않냐”며 “법에 불명확한 규정이 많아 대응책을 만들기 어렵고, 사고 발생 때 누가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몰라 한숨만 쉬다가 회의를 끝냈다”고 말했다.

중대재해법이 국무회의를 통과하면서 내년 시행을 위한 법적 절차가 완료됐다. 중대재해법은 산업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거나 크게 다치는 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에게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는 법이다.

경영계에서는 그동안 모호하고 포괄적인 규정이 많아 기업이 과도한 형사 책임을 져야 한다며 보완 입법을 요구했지만 시행령은 사실상 원안 그대로 국무회의에서 통과됐다. 재계에선 “내년부터 제조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 극심한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예상 부작용

◇경영계 요구 거의 반영 안 돼

정부는 지난 7월 중대재해법 시행령안을 입법 예고하면서 경영계 요구 사항을 수렴하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사업장마다 산업보건의를 1명씩, 안전관리자와 보건관리자를 각 1명씩 배치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은 일부 완화했다.

하지만 경영 책임자의 사고 책임 범위 등 모호한 규정들이 고쳐지지 않아 자칫 ‘기업 처벌법’으로 악용될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중대재해법은 안전사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경영자를 단순히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 ‘이에 준하여 안전 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최종 책임자가 최대 주주인지, 최고경영책임자(CEO)인지, 안전 담당 임원인지 애매하다. 재계 관계자는 “사고 발생 위험이 높은 화학·철강 업종의 경우 임원들이 형사 처벌이 두려워서 안전 담당 임원 자리를 꺼리는 분위기”라며 “일부 중소기업에서는 오너들이 대표 자리에 벌써부터 바지사장(이름만 빌려준 사장)을 앉히고 경영을 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중대재해법에 따르면 근로자의 과실이 큰 경우에도 사고 발생에 기업이 1%라도 책임이 있으면 경영자가 처벌을 받게 된다. 경총 관계자는 “근로자가 음주 후 추락한 게 명백하더라도 기업이 추락에 대한 안전 조치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한 게 있으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은 천재지변에 의한 사고나 근로자의 과실로 인한 사고의 경우에는 경영 책임자의 처벌 수위를 낮춰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마저도 법안에 반영되지 않았다.

◇산업 현장 극심한 혼란 예상

산업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경영 책임자가 최대 20시간의 안전 보건 교육을 수강해야 하는 규정도 원안 그대로 의결됐다. 만약 교육 수강을 하지 않을 경우 1차 위반 시 1000만원, 2차 3000만원, 3차 5000만원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회사 경영을 사실상 혼자 책임져야 하는 중소기업 대표의 경우 교육을 받기 위해 회사를 비우는 것도, 과태료도 모두 부담되는 상황이다.

산업재해 발생 빈도가 높은 건설업계의 경우 ‘처벌 1호’ 사례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 패닉에 빠진 상태다. 고용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산업재해 사망자의 절반이 건설업에서 나왔다. 대한건설협회 관계자는 “대기업의 경우 수백 곳의 건설 현장이 있는데 어떻게 경영 책임자가 사고를 100% 예방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경제 단체는 보완 입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전승태 경총 산업안전팀장은 “중대재해법은 경영 책임자에게 안전·보건관계법령에 따른 의무 이행을 부과하고 있지만 안전·보건관계법령이 어떤 법령인지 정하지 않고 있다”면서 “성급하게 제정된 법이 각종 부작용을 만들기 전에 법과 시행령 모두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