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올 들어 사상 최대 실적을 내면서도 고용은 제자리걸음한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본지가 국내 매출 상위 30대 기업의 반기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지난 상반기 이 기업들의 총매출액은 381조9742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320조9180억원)보다 19% 늘고, 영업이익은 33조1753억원으로 작년(10조3707억원)의 3배가 넘었다. 코로나 쇼크가 덮쳤던 작년 상반기와 비교한 기저 효과와 글로벌 경기 회복, 보상 소비가 맞물려 전자·자동차·철강·에너지·유통 등 전 분야 실적이 크게 개선된 덕분이다.

하지만 상반기 이들 기업의 근로자는 52만5534명으로 1년 새 0.96%(5016명) 증가하는 데 그쳤다. 특히 고용을 가장 크게 늘린 삼성전자(5031명 증가)를 빼면 30대 기업의 전체 직원 수는 오히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경제 대표 기업들의 ‘고용 없는 성장’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김용춘 한국경제연구원 고용정책팀장은 “안팎으로 경기 불확실성이 큰 데다 정부발 각종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어 기업들로선 신규 채용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평균연봉 1억 받는 기업 3곳 중 2곳 고용 줄었다

올 상반기 국내 주요 철강 회사들은 ‘역대급 실적’을 거뒀다. 조선·건설·가전·자동차 등 철강 제품의 수요 산업이 호황을 맞았고, 글로벌 철강 제품 가격이 상승한 덕분이다. 포스코는 올 상반기 3조7530억원의 영업이익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지난해 상반기 157억원의 영업 적자를 냈던 현대제철도 1년 만에 반기 기준 최대 영업이익(8492억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고용 측면에서는 실적이 초라했다. 1년 사이 포스코 종업원 수는 1% 증가하는 데 그쳤고, 현대제철은 고용 인원이 300명 이상 줄었다.

◇매출 상위 30대 기업, 3곳 중 2곳은 고용 줄였다

19일 본지가 국내 매출 상위 30대 기업의 반기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30개 기업 중 19곳에서 직원 수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철강뿐 아니라 건설(삼성물산·현대건설)·정유(현대오일뱅크·에쓰오일) 등 다양한 산업군에서 고용이 감소했다.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영업이익이 900% 이상 급증한 기아차 역시 종업원 수는 소폭 줄었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모든 분야에서 무인화·자동화가 급격하게 이뤄지면서 고용 시장이 줄어드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추세”라고 말했다. 또 삼성을 제외한 주요 그룹들이 공채를 속속 없애고 수시 채용으로 전환하는 것도 고용 축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자료=전국경제인연합회,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지난 2분기 1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거둔 통신 3사도 직원 수가 크게 줄었다. KT는 약 1000명 가까이, LG유플러스와 SK텔레콤은 각각 430명, 119명씩 감소했다. KT 측은 “공기업 시절 입사했던 현장 직원들이 정년을 맞으면서 인력 감소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SK텔레콤은 지난 연말 T맵모빌리티 분사 때문에 인력이 대폭 줄었다.

고용 면에서도 ‘반도체·배터리’ 쏠림 현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종업원이 5000명 이상 늘어난 삼성전자는 “고용 증가 인원 상당수가 반도체 개발자나 엔지니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도 500명 이상 증가했다. 배터리 분야에서는 최근 분사한 LG에너지솔루션을 포함해 LG화학은 1년 사이에 2000명 가까이 근로자가 늘었고, 삼성SDI도 143명이 늘었다.

대표 공기업인 한전은 지난 1년 새 종업원 수가 2만2836명에서 2만3333명으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공기업 고용을 대거 늘리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지만, 탈원전 여파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고용 경직성, 경영 불확실성이 기업 고용 의지 꺾어”

전문가들은 고용 경직성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한 대기업들의 고용은 갈수록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인공지능(AI)·빅데이터·전기차 등 산업 전환기를 맞아 대대적인 인력 재편이 필요한 상황인데도 기존 직원들의 기득권 때문에 새로운 인재를 채용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산업현장에서는 “일단 입사하면 일을 잘하든 못하든 무조건 정년까지 보장해야 하는데 어떻게 신규 인력을 뽑겠느냐”고 말했다.

2020-2021년 증감%

박기성 성신여대 교수는 “한국은 사실상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노조가 파업을 할 때 기업이 대체 근로자를 투입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 규제가 심한 국가”라며 “노조에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정부가 기업에 무턱대고 고용을 늘리라고 요구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 노동학 전공 교수는 “현 정부 들어 100% 정규직 전환을 밀어붙인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처럼 고용 안정화만 강조하면서 기업들이 비정규직조차 채용하는 것을 꺼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기업이 일자리를 인적 투자로 여겨야 하는데 반대로 기업 리스크로 받아들이는 게 우리 현실”이라고 말했다.

열악한 투자 환경과 코로나 이후 거세진 경영 불확실성도 기업들의 고용 확대를 가로막고 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단기 계약직을 양성해 일자리 창출하는 것보다 지속 가능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기업 투자를 이끌어내려는 정부의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