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섬유 가공 업체를 운영하는 김모(59) 대표는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16억~17억원을 대출받았다. 코로나 이전 99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60억원으로 급감한 데다 영업 손실이 10억원이나 나면서 자금난에 빠진 것이다. 김 대표는 “섬유 원단을 염색해 동남아에 수출해왔는데 코로나 집단감염 우려로 동남아 현지 의류 공장들이 운영을 하지 않으면서 수출길이 막히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LG전자·포스코·현대제철·LG화학·CJ제일제당 같은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올 2분기 최대 실적을 달성한 반면 한국 경제의 뿌리인 대다수 중소기업은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 인력난과 원자재값 폭등, 매출 감소라는 3중고에 허덕이며 체력이 바닥난 상태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대기업 실적이 좋다 보니 경제 전체가 살아나고 있다는 착시 현상이 있다”면서 “대기업과 상장 중견·중소기업들은 잘나가고 뿌리 산업을 책임지는 영세 중소기업은 말라죽는 K자형 양극화가 우리 경제의 진짜 현주소”라고 말했다.
◇영세 중소기업 매출 반 토막
본지가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의뢰해 지난 1분기 매출액 100억원 이상 등 외부 감사를 받는 국내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의 실적을 분석한 결과, 대기업 249곳의 영업이익은 작년 동기보다 130.7%, 중견기업(907곳)은 64.4%, 중소기업(870곳)은 298.9% 각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실적 증가세는 2분기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금융 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9일까지 2분기 잠정 실적을 발표하거나 증권사 3곳 이상이 2분기 실적을 추정한 377개 상장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의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2.4%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88.4%나 올랐다.
그러나 영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상황은 이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연매출 120억원 이하인 소기업의 공장 가동률은 2019년 70.1%에서 지난해 65.1%로 급감한 뒤 지난 6월에도 67.2%에 그쳤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중소 제조업체 500곳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서도 전년 동기 대비 1분기 매출액이 감소한 기업은 49.6%로 2곳 중 1곳꼴이었다. 이들 기업의 매출은 23.3% 감소했다.
회사 문을 닫는 업체도 속출하고 있다. 대한니트협동조합연합회 소속 600여 업체 중 코로나 이후 폐업한 업체는 50여 개로 추산된다. 실제 경기 포천에서 섬유 제품 제조 업체를 운영하는 강모(82)씨는 코로나로 폐업 위기에 몰린 상태다. 강씨는 “연매출이 60억원은 돼야 회사를 꾸려 갈 수 있는데 지난해 매출이 반 토막 났다”고 말했다. 강씨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3년 전 50억원을 대출받아 제조 설비를 새로 들여놨는데 매출이 급감하면서 빚을 갚을 길도 막막해졌다. 강씨는 “최근엔 기계 부품을 제 값의 3분의 1 에 팔면서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내 양극화까지 발생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실적 양극화 못지않게 심각한 현상은 중소기업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양극화다. 중소기업계 관계자들은 “대기업의 1~3차 협력 업체나 상장 중소기업들의 실적은 꽤 좋은 편”이라면서 “문제는 상장이 안 되고, 외부 감사도 받지 않는 영세 중소기업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의 90% 이상은 외부 감사를 받지 않는 기업이라 이들의 실적이 얼마나 급락했는지 공식 통계로 파악할 방법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 경기 하남에서 의류 제조 업체를 운영하는 하모씨는 “코로나 이후 주력 사업이었던 야외 행사 관련 운동복 매출이 완전히 사라졌다”면서 “예년 매출은 40억~50억원 수준이었는데 지난해에는 26억원으로 급감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계에선 K자형 양극화를 해소할 특단의 대책을 정부가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추문갑 중기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주52시간제 적용으로 임금이 줄면서 직원들이 잇따라 이직하자 수주가 들어와도 이를 포기하는 게 중소기업 현실”이라면서 “정부는 하루 빨리 주52시간제 보완책을 내놓아야 하고,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 이익을 본 만큼 고통 분담 차원에서 납품가를 현실화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