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지정 여부를 두고 논란이 됐던 쿠팡 김범석<사진> 이사회 의장이 총수 지정을 면했다. 김 의장이 미국 국적이라서 총수로 지정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규제가 어렵다는 이유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9일 대기업집단(공시대상기업집단)과 총수를 지정·발표하면서 새로 대기업집단이 된 쿠팡의 총수를 김범석 의장 대신 쿠팡 한국 법인으로 정했다.
국내 기업집단은 자산 총액이 5조원 이상이면 대기업집단이 된다. 대기업집단이 되면 계열사 현황, 내부 거래 내역 등을 공정위에 신고·공시해야 한다. 공정위는 대기업집단을 지정하면서 총수도 함께 정한다. 총수인지 여부는 보유한 지분율과 실질적 지배 여부 등을 고려해 결정한다.
만일 개인이 총수로 지정되면 배우자뿐만 아니라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 계열사와 거래 내역 등도 공시해야 한다. 반면 법인을 총수로 정하면 계열사들과 거래 내역만 공시하면 된다. 법인에 비해 개인인 총수에 대한 규제가 더 강한 것이다.
◇“김 의장이 실질적 지배자지만 외국인이라 규제 어렵다”
공정위는 “미국인인 김범석 의장이 미국 쿠팡을 통해 국내 쿠팡을 지배하고 있음이 명백하다”면서도 “그동안 외국계 기업은 국내 법인을 동일인(총수)으로 판단해온 점, 현실적으로 외국인을 제재하기 어려운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김 의장이 쿠팡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지만 외국인이라 현실적으로 규제하기 어렵다는 현실론을 반영한 것이다.
김재신 공정위 부위원장은 “예를 들어 아마존코리아가 대기업집단이 됐다고 해서 제프 베이조스를 총수로 지정해 한국 법의 의무를 부과하고 위반할 경우 형사 제재를 할 순 없지 않으냐”고 했다.
이번 논란을 통해 현행 총수 지정 제도의 한계와 문제점도 드러났다. 공정위는 “현행 규제가 국내 기업을 전제로 설계돼 있어 당장 외국인을 총수로 지정해 규제하기에는 집행 가능성, 실효성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 “현재는 총수의 정의·요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투명성이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도 했다.
학계에선 이번 기회에 재벌 중심의 낡은 총수 지정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총수 지정 제도는 1987년 재벌 일가의 사익 추구 등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하지만 네이버나 쿠팡처럼 최근 대기업집단으로 부상한 IT 기업들은 친인척의 도움 없이 창업자가 스타트업(신생 기업)으로 시작해 성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존 재벌 그룹과는 지배 구조가 다른데도 획일적인 규제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공정위도 총수 지정 제도 전반의 개선 방안을 만들기로 했다.
◇현대차·효성 총수는 정의선·조현준으로
공정위는 이날 현대차그룹의 총수를 정몽구 명예회장에서 정의선 회장으로 변경했다. 효성도 조석래 명예회장에서 조현준 회장으로 총수가 바뀌었다. 공정위는 “대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2세들을 동일인으로 판단해 권한과 책임을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현대차에 대해선 “정의선 회장이 이미 현대차 등 주력 회사의 회장으로 취임한 점, 정몽구 명예회장이 보유한 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정의선 회장에게 포괄 위임한 점, 정의선 회장이 현대차 회장으로 취임한 후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는 등 기업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점, 정몽구 명예회장이 84세 고령으로 경영 복귀 가능성이 높지 않은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재계 5대 그룹의 총수가 전부 창업주의 자녀나 손자들로 ‘세대교체’ 됐다. 이날 쿠팡 외에도 한국항공우주산업, 현대해상, 중앙 등 7개 기업집단이 새로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