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전원회의실에서 이례적인 회의가 열렸다. 조성욱 위원장 등 7명의 공정거래위원들이 김범석<사진> 쿠팡 이사회 의장을 총수로 지정할지 여부를 논의했다. 9명으로 구성된 전원회의는 공정위의 최종 의결 기구다. 다른 회의를 하던 중간에 논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전원회의에서 총수 지정 문제가 논의된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 그만큼 이 문제가 공정위의 고민거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정위 안팎에서는 이날 참석한 7명 가운데 조 위원장과 김재신 부위원장은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나머지 5명의 위원은 총수 지정 찬성 3명, 반대 2명으로 갈렸다는 말이 나온다. 팽팽한 가운데 찬성 쪽이 약간 우세했던 셈이다.
공정위는 오는 29일 대기업집단(그룹)과 총수를 지정할 예정이다. 쿠팡이 뜨거운 감자다. 김범석 의장이 미국 국적의 외국인이라서다. 공정위는 그동안 외국인을 총수로 지정한 선례가 없다. 당초 이런 이유로 김 의장 대신 쿠팡 법인을 총수로 지정하려 했는데 “검은 머리 미국인이 특혜를 받는다”는 비판이 나오자 공정위는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최종 결정은 조성욱 위원장이 한다. 공정위 안팎에선 조 위원장이 “검은 머리 미국인에게 특혜를 준다”는 비판을 부담스러워한다고 한다.
◇“검은 머리 미국인 특혜 안 돼”
국내 기업은 자산 총액이 5조원 이상이면 대기업집단(그룹)으로 지정된다. 매년 4월 말 공정위가 지정해 발표한다. 대기업이 되면 공정위에 계열사 현황, 내부 거래 내역 등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본격적으로 감시망에 들어가는 것이다. 공정위는 대기업을 지정하면서 동일인이라고 부르는 총수도 지정한다. 대기업집단은 자산 총액 5조원 이상이면 자동으로 지정되지만 총수는 공정위가 지분율, 실질적 지배 여부 등을 고려해 결정한다. 기업마다 내부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총수는 개인일 수도 있고, 법인(회사)일 수도 있다. 총수로 지정되면 배우자뿐만 아니라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 계열사와 거래 내역 등도 공시해야 한다. 법인을 총수로 지정하면 계열사들과 거래 내역만 공시하면 된다.
김 의장 총수 지정 찬성론자들은 김 의장이 미국인이라고 하지만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실질적으로 쿠팡을 지배하고 있지 않으냐고 비판한다. 김 의장은 쿠팡 지분을 10.2% 보유한 3대 주주다. 하지만 이사회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의결권 비중은 76.7%에 이른다. 실질적으로 쿠팡을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공정위는 적은 지분을 보유한 네이버 이해진 창업자도 네이버를 실질적으로 지배한다며 총수로 지정한 적이 있다. 단, 이해진 창업자는 외국인은 아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공정거래법에 외국인은 총수로 지정할 수 없다는 명시적인 규정이 없는데 그동안 관례를 들어 총수로 지정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사우디 왕세자 빈 살만도 총수 지정?”
반대론자들은 외국인에 대해 현실적인 제재가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다. 김 의장을 총수로 지정할 경우 대주주가 외국인이라 한국 법인을 총수로 지정한 ‘에쓰오일’ 문제가 불거진다는 점도 지적한다. 에쓰오일 대주주인 아람코의 실질적 지배자라고 불리는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도 총수로 지정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럴 경우 사우디 왕가는 물론이고 빈 살만 왕세자가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뉴캐슬 유나이티드 축구단도 한국 공정위에 공시해야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렇게 제출한 자료를 공정위가 검증하기도 어렵고 오류가 있더라도 제재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위반 가능성도 제기된다. 김 의장을 총수로 지정해 규제하면, 미국인 투자자를 제3국 투자자(사우디 아람코)와 차별해선 안 된다는 한·미 FTA 최혜국 대우 규정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 총수로 굳이 지정하지 않더라도 공정거래법 등 다른 법을 통해 규제가 가능하다는 견해도 있다.
이번 기회에 재벌 중심의 낡은 총수 지정 제도 자체를 손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총수 지정 제도는 1987년 재벌 일가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 부의 세습 등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하지만 최근 대기업이 된 네이버, 카카오 등 IT 기업들은 기존 재벌 그룹과 달리 순환출자, 친족 경영과 거리가 있다. 쿠팡은 그동안 외국인을 총수로 지정한 선례가 없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공정위 결정에 반발해 행정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는 “쿠팡이 매년 해외 계열사의 공시 자료를 제출할 때마다 논란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공정거래법상 총수
자산총액 5조원 이상 대기업 그룹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람이나 법인. 총수로 지정되면 6촌 이내의 혈족과 4촌 이내의 인척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 계열사와 거래 내역 등을 공시해야 한다. 총수가 법인이면 계열사 현황만 공시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