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세대 IT(정보기술) 기업인 한글과컴퓨터에서 노조가 17년 만에 부활했다. 지난 23일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한글과컴퓨터 지회는 노조 설립문을 통해 “한글과컴퓨터는 최근 수년간 업무 문화와 노동 환경이 퇴보해 왔다”면서 “구성원들의 노력은 개개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아니라 극소수를 위한 돈 잔치로 돌아왔다”고 밝혔다. 한컴 노조는 2001년에 설립된 적이 있지만 개인별 성과주의 문화가 강한 벤처 기업 특성상 노조 유지가 어려워 2004년 자진 해산했었다. 그러나 최근 업무 환경 개선과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노조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카카오뱅크에서도 25일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며 민노총 산하 노조가 설립됐다.

지난달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에서 삼성그룹 노조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임금 인상 및 제도 개선 공동 요구안을 발표한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전국삼성전자노조는 조만간 임금 10% 인상안을 제시하고 사측과 교섭에 나설 계획이다. /연합뉴스

연초부터 산업계 곳곳에서 노사 관계에 짙은 먹구름이 끼고 있다. 그동안 노조 무풍 지역으로 불렸던 IT업계에 노조가 잇따라 들어선 데다 지난해 말 노조법 개정안 통과로 7월부터 해고자의 노조 가입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각 기업에서 연봉·성과급 인상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하면서 노조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면서 “기업들엔 코로나 극복, 신성장 동력 발굴에 이어 신세대 노조와의 관계 재정립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삼성·LG·네이버도 노조와 갈등

‘무노조 경영’으로 매년 3월 초 임금 협상을 마무리지었던 삼성전자에선 올해 이례적으로 임협을 놓고 난항을 겪고 있다. 노사 자율 조직인 삼성전자 사원협의회가 사측에 6% 인상을 요구했지만, 사측이 3%대 인상을 제시하면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노총 소속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은 이달 중 10%대 임금 인상안을 요구하며 사측과 교섭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2019년 11월 출범한 삼성전자노조 조합원 수는 지난해 12월 1500여명에서 현재 2500여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5월 이재용 부회장이 무노조 경영 폐기를 선언하면서 노조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고 있다”고 말했다.

LG전자에서도 이달 초 사무직 노조가 새로 설립됐다. 사무직 직원들은 올해 사업부별 성과급이 최대 30배까지 차이 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노조를 결성했다. 현재 노조원 수가 3000명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LG전자 전체 사무직은 2만5000여명이다. 사무직 노조는 현 교섭 대표인 기능직 노조와 분리된 별도의 교섭 대표 자격으로 사무직 근로자들을 위한 임협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2018년 4월 민노총 산하 노조가 설립된 네이버에서도 직원 보상을 놓고 노사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4일 열린 네이버 정기 주총에서는 조합원들을 대표해 참석한 노조 관계자가 직원 보상안 개선을 요구하며 최인혁 COO(최고운영책임자)의 사내 이사 재선임안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노조법 개정안으로 기업 우려 커져

제조업계도 마찬가지다. 현대중공업은 2019~2020년 2년치 임금 협상을 아직까지 타결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일 노사 간 잠정 합의안을 도출했지만 노조원들이 투표로 이를 부결시킨 뒤 지난 19일에는 파업을 단행했다. 노조는 2019년 투쟁 과정에서 폭행과 기물 파손 등으로 해고된 노조원의 복직도 요구하고 있다. 올 7월부터는 개정된 노조법 시행으로 해고자의 노조 활동이 가능해지면서 해고자들이 앞장서서 강경 투쟁에 나설 수도 있다고 업계는 전망한다. 또한 지난해 12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강경파인 양경수 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업계의 긴장감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 양 위원장은 지난 19일 ‘공공부문·비정규직 5~6월 전면 투쟁’ ’11월 총파업'을 예고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IT 업계도 노조 활동 필요성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기존 노조 활동 방식처럼 전투적인 모습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면서 “개인의 기여도에 따라 성과를 보상한다는 원칙에 대해서는 노조도 양보하고 사측과 협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