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11일 세계 최고 수준의 로봇 공학 기술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미국 로봇 제조기업 ‘보스턴 다이내믹스’ 인수를 결정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취임 후 첫 대규모 인수·합병(M&A)으로 앞으로 현대차그룹이 자동차 제조업체에 머물지 않고 ‘종합 테크 기업’으로 발돋움하겠다는 정 회장의 미래 전략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린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일본 소프트뱅크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보스턴 다이내믹스 지분 80%를 8억8000만달러에 인수하기로 소프트뱅크그룹과 최종 합의했다고 밝혔다. 남은 20%는 소프트뱅크그룹이 계속 보유한다. 현대차그룹의 지분 인수에는 현대차(30%)와 현대모비스(20%), 현대글로비스(10%) 등 계열사들이 참여하며 정 회장이 사재 2400억원을 출연해 지분 20%를 보유한다. 정 회장의 지분 참여는 현대차그룹이 앞으로 본격화할 미래 신사업에 대한 책임경영을 강화하고, 지속적인 투자 의지를 표명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현대차그룹은 설명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는 로봇 공학계에서 ‘로봇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신기원을 이룩한 기업’이라 평가받는 기업이다.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였던 창업자 마크 레이버트 대표에 의해 1992년 대학 내 벤처기업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2013년 구글을 거쳐 2017년 6월 소프트뱅크에 인수됐다. 소프트뱅크그룹이 올 초 대규모 적자로 휘청거리며 현금 확보에 나서면서 현대차그룹 품으로 넘어오게 됐다.
보스턴 다이내믹스는 개발한 여러 로봇들을 통해 뛰어난 기술력을 증명해왔다. 2004년 처음 군수 물자 운송용으로 개발한 4족(足) 보행 로봇 ‘빅 독’은 수십kg의 짐을 진 채 사람도 다니기 어려운 험지를 자유롭게 다니는 모습으로 화제가 됐고, 와일드캣·스팟 등 이후 개발된 보행 로봇들은 발로 차거나 밀어도 알아서 균형을 회복하고 넘어져도 일어나는 등(영상 링크) 그간 볼 수 없던 혁신적인 로봇제어 기술력을 뽐냈다.
2011년 개발된 뒤 매년 개선을 거쳐온 2족 보행 인간형 로봇 ‘아틀라스’는 더 큰 충격을 줬다. 계단과 장애물을 빠른 속도로 건너는 것은 기본이고 물구나무 서기와 공중제비까지 도는 모습(영상 링크)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아틀라스의 보행 영상이 공개된 후 인터넷에선 “자연스러운 동작이 생명체같아서 불쾌하다”는 반응까지 나올 정도였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인수로 그룹 차원의 제조·생산, 기술 개발, 물류 역량에서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로봇의 센싱(인지) 기술은 자율주행차·도심항공기(UAM) 운용에도 요구되는 기술이고, 인공지능을 활용한 대응 및 판단 기술과 외부 환경 변화에 따라 정밀하게 구동하는 제어 기술은 향후 완전 자율주행 구현에 필수 요소다.
차세대 로봇 기술은 미래 자동차 제조 공정에도 쓰일 수 있다. 현대차그룹이 2022년 말 완공을 목표로 싱가포르에 짓고 있는 ‘현대차그룹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HMGICS)’가 대표적이다. 현대차그룹은 이곳에서 고객 주문 맞춤형 전기차를 생산할 계획으로, 로봇 중심의 셀(Cell) 단위 제조 공정을 도입할 방침이다. 셀 방식 제조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가공과 조립이 이뤄지던 기존 완성차 제조 방식에서 벗어나 가공·조립·이송·검사 등의 전 제조 과정이 차 한 대 규모의 작은 공간(셀)에서 이뤄지는 걸 말한다. 이때 중요한 기술이 사람을 돕거나 사람 역할을 하는 협동 로봇과 자재를 실어나르는 자율주행 물류 로봇인데, ‘핸들’과 ‘픽’ 등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개발한 물류형 로봇들이 도입될 가능성도 있는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우선 시장 규모가 크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물류 로봇 시장에 진출하고, 이어 건설 현장 감독이나 시설 보안 등 각종 산업에서의 안내·지원 역할을 할 수 있는 서비스형 로봇 사업에 집중할 것으로 알려졌다.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이미 작년 ‘스팟’을 양산형으로 개발한 뒤 올해 6월부터 본격 판매에 나서고 있어 향후 국내외 각종 건설 현장이나 제조 공정에 서비스형 로봇으로 투입이 확대될 전망이다. 장기적으로는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사업에도 진출할 예정이다.
현대차는 앞서 ‘로보틱스’를 핵심 사업으로 키우겠다는 방침을 세운바 있다. 정의선 회장은 지난해 10월 “현대차그룹은 자동차 50%, 도심항공기 30%, 로봇 20%의 비중인 회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CES에서는 ‘걸어다니는 자동차’ 콘셉트 모델을 공개하는 등 로봇과 자동차를 결합한 차를 개발 중이기도 하다.
정 회장은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거듭나는 현대차그룹의 역량에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로보틱스 기술이 더해져 미래 모빌리티의 혁신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의 보스턴 다이내믹스 인수는 한국·미국 등 관련 정부 부처의 승인 절차를 거쳐 이르면 내년 상반기 중으로 최종 마무리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