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공 경영본부장을 맡고 있던 김재천(47) 부사장은 지난 1일 AK그룹 인사에서 그룹 유통 부문을 책임지는 AK플라자 대표이사에 발탁됐다. 오너를 제외하면 AK그룹 역대 최연소 대표다. 발령 직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국 백화점·쇼핑몰 8곳을 도는 일정을 짜는 것이었다. 대표이사가 되면 사무실에서 부문별 현황 보고부터 받는 게 일반적이지만, 김 대표는 현장부터 찾았다. 만나는 매장 직원들에겐 감사 문구를 담은 자체 제작 스티커를 붙인 비타민 음료를 건네고 있다. 자신의 모든 업무 일정은 각 사업부장과 캘린더 앱으로 공유하고, 급한 보고는 수시 화상회의로 받는다. 궁금한 게 있으면, 신입부터 임원까지 메신저로 직접 묻는다. 김 대표는 “직원들과 소통하면서 일을 가장 효율적으로 할 방법부터 찾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재계 임원 인사에선 1970년대생들이 전진 배치됐다. 한화그룹에선 김은희(42) 한화역사 대표이사 등 1970년대생 CEO(최고경영자) 3인방이 탄생했다. 지난 7일 출범한 LG그룹의 인공지능 연구 전담 조직인 ‘LG AI연구원’ 원장을 맡은 배경훈 상무는 1976년생. 삼성전자의 종합기술원·무선사업부 등 주요 부서에서도 1977~1979년생 임원이 연이어 나왔다.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 ‘X세대 임원’들은 이제 예외적 발탁 인사가 아니다. 올해 롯데그룹은 신임 임원 총 50명 가운데 45명(90%), LG전자는 70%가 여기에 해당한다. X세대가 스타트업뿐 아니라, 대기업 임원의 주력 세대로 성장한 것이다.

대기업 계열 한 소프트웨어 업체 국내 영업팀 최모(49) 상무는 10년 전 선배로 모시던 이모(54) 부장 위로 인사 발령이 났다. 예전 같으면 이 부장이 부서를 옮기거나 비교적 한가한 업무를 맡도록 해, 후배가 선배를 지휘하는 건 피하도록 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최 상무는 이 부장에게 이전에 하던 거래처 관리 업무 10여 가지를 그대로 맡겼다. 최 상무는 “조직 관리를 해야 하는 임원의 자질이 부족할 뿐, 이 부장의 영업력은 그대로 활용하고 싶었다”며 “대신 사석에선 ‘형’이라고 부르며, 공사(公私)를 구별한다”고 말했다.

기업 사무실에선 40대 임원 아래에 50대 부장, MZ세대(밀레니얼+Z세대·1980~2000년대생) 신입이 함께 일하는 풍경이 일상이 됐다. 보수적이며 연공서열에 치중해온 기업 문화가 자취를 감추고 성과주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박원우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직급이 아닌 역할을 중시하는 수평적 조직인 팀(team)제가 과도기를 거쳐 조직 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다”며 “앞으로 어린 상사를 모시는 건 일상적인 일이 될 것이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며 임원을 목표로 하지 않는 직원도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X세대 임원’의 등장은 기업 문화를 바꾸고 있다. 4대 그룹의 한 IT(정보통신) 계열사 개발 부서는 지난해 이모(42) 상무가 내부 승진한 후 일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 상무는 모든 보고를 메신저로 받는다. 궁금한 게 있으면 전화하거나 부르지 않고, 직접 직원 자리로 찾아가서 묻는다. 사라진 일상도 몇 가지 있다. 예고 없는 ‘번개 회식’, 눈치가 보이는 ‘퇴근 인사’, ‘야’라는 호칭이다.

X세대 임원은 대학 때부터 삐삐·휴대폰 등을 사용해 온 ‘디지털 신인류’. 줌(화상회의 앱)·슬랙(업무용 채팅앱) 같은 디지털 기술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변화의 무기다. 1960년대생 임원만 해도 화상회의가 있으면 젊은 직원들이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설치해 줘야 했다. IT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X세대 임원은 본인이 직접 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소통을 즐긴다. 한 10대 그룹 임원은 “최근 삼성·현대차·SK·LG 등 주요 그룹에서 40~50대 젊은 총수들이 수평적이면서도 소통이 자유로운 사내 문화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이를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이 70년대생 임원들”이라고 말했다.

70년대생 임원들의 고충도 있다. 자신들이 모시는 ‘상사’는 여전히 연공서열과 성과주의에 익숙한 1960년대생이 많다. 자신들의 손발이 돼주는 이들은 자유분방한 1980년대 중반 이후 출생한 MZ세대다. 이들 사이에서 업무를 조율하고 조직을 관리해야 하는 ‘낀 세대’인 셈이다. 대기업 전자 계열사에서 AI(인공지능) 업무를 담당하는 이모(47) 상무는 “지시는 위에서 일방적으로 내려오는데, 이를 그대로 팀원들에게 내려보낼 수 없다”며 “MZ세대 팀원을 설득하기 위해 별도 자료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70년대생 임원들을 ‘교량 세대’라고 했다. 그는 “앞선 세대와 후속 세대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두 세대 간 긴장 갈등을 완화할 수 있다”며 “기업에서도 1970년대생 임원들이 이런 교량(다리)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