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배수진’을 쳤다.”
최근 재계에서 부쩍 많이 나오는 말이다. 미·중 무역 갈등과 코로나발(發) 위기 등으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있다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주요 기업들이 앞다퉈 ‘배’터리와 ‘수’소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는 데서 ‘배수진’이란 말이 재계에서 유행하고 있다. 10대 그룹 가운데 배수진을 치지 않은 기업은 유통 사업 중심인 신세계뿐이다. 재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과 각국 정부도 미래 성장 동력으로 배터리와 수소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10년 뒤엔 성패가 갈릴 것”이라고 말했다.
◇10대 그룹 중 9곳이 배수진
전기차에 쓰이는 배터리는 이미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이노베이션 등 이른바 ‘K배터리 3사’가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배터리 업계에선 신생 업체가 배터리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선 막대한 투자에 더해 최소 7년의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진입 장벽이 높다는 것이다.
K배터리 3사를 제외한 국내 기업들은 대신 배터리 소재 사업에 잇따라 진출하고 있다. 포스코그룹은 지난 3일 세계 최고 이차전지(배터리) 소재 기업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포스코는 양극재와 음극재 등 배터리 소재 사업과 함께 리튬·니켈 및 흑연 등의 배터리 핵심 원료 사업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롯데그룹은 롯데알미늄에서 지난 9월 배터리용 양극박 생산 확대를 위해 공장을 증설했다.
수소 사업도 마찬가지다. SK는 지난 1일 수소 사업 추진단을 출범시켰다. SK는 “차세대 에너지로 수소 사업을 집중 육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본업인 철강을 넘어 신성장 사업으로 배터리 업계에 투자하고 있는 포스코도 오는 11일 이사회에서 수소 사업 진출을 공식화할 것으로 알려졌다. GS칼텍스는 수소 충전소 인프라를 확대하고 있다. 한화는 충남 서산 대산산업단지에서 수소 연료전지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대기업들이 앞다퉈 배수진을 치는 건 그만큼 배터리와 수소 분야의 전망이 밝기 때문이다. 시장조사 기관 IHS마킷은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연평균 25%씩 성장, 오는 2025년이면 1600억달러(약 173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컨설팅 업체 맥킨지는 2050년 수소 사업 시장 규모가 연간 2조5000억달러(약 2715조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재계 관계자는 “배터리와 수소 사업은 성장 가능성이 어떤 분야보다 높은 게 사실”이라며 “여력이 있는 대기업 입장에선 투자해볼 만한 분야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10년 뒤 극소수만 살아남을 것”
문제는 배터리·수소 사업에 진출한 기업들이 모두 성공할 수 있느냐다. 배터리의 경우 대규모 설비투자가 불가피해 이 분야 세계 1위인 LG가 이제 막 흑자를 내는 단계다. 배터리 업계에선 10년 안에 세계 배터리 시장이 소수 정예로 재편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배터리도 향후 상위 3~4사가 전 세계 물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는 게 중론”이라며 “극소수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터리 소재 분야도 다르지 않다. 업계 관계자는 “메이저 배터리 제조사들은 핵심 소재를 내재화하고 있다”며 “꾸준한 투자로 기술을 확보한 소재 회사만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잘 아는 기업들은 큰 규모의 투자 계획을 쏟아내고 있다. 포스코그룹 배터리 소재 사업을 맡고 있는 포스코케미칼은 지난달 포스코 증자 규모로는 사상 최대인 1조원 규모 유상증자를 단행하기도 했다.
이른바 ‘탈(脫) 탄소 시대’의 주요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는 수소 사업은 시장 선점을 위한 경쟁이 더욱 치열하다. 국내는 물론 글로벌 수소 시장이 아직 초기 단계이기 때문이다. 수소 사업을 하고 있는 한 기업의 임원은 “수소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활용하는 각 분야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라며 “수소 사업이 안착하는 데는 배터리 분야보다 더욱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화석연료를 태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소가 아니라, 신재생 에너지 발전을 활용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지 않는 그린 수소를 대량 생산하는 데에는 10년 이상이 걸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수소 사업에 본격 진출하겠다고 발표한 SK 역시 “장기적으로 그린 수소 생산 사업을 적극 추진해 친환경 수소 공급 체계를 완성하겠다는 전략”이라고 밝혔다.
수소 사업에 진출한 기업들의 생존 여부를 결정짓는 데는 각국 정부의 역할이 클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유럽 등이 수소 사업을 미래 성장 사업으로 보고 저마다 수소 전략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수소 사업은 물론이고 배터리 분야까지 기업 역량에 더해 각국 정부의 뒷받침이 시너지를 내야만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