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두 달 가까이 공석이던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에 4선 친명 중진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전격 지명하면서 ‘나라 곳간’을 정권 실세에게 맡긴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정기획위에서 이재명 정부의 예산 체계 밑그림을 직접 그린 인물로, 사실상 ‘이재명표 예산’의 설계자가 집행자로도 나서게 됐다. ‘벚꽃 추경’ 논의가 본격화하고 대규모 국책사업 예산 편성을 앞둔 시점에 국가 재정의 컨트롤타워를 대통령의 최측근에게 맡긴 셈이다. 재정 건전성보다 정치적 논리가 예산 편성을 좌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한편, 출범 초기부터 존재감이 약했던 구윤철 경제부총리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는 3일 오전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 내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첫 출근하며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고 말했다. 확장재정 우려를 의식한 듯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면서도, “민생경제가 벼랑 끝에 서 있는 만큼 지속가능한 적극 재정의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불필요한 예산은 과감히 줄이면서도 재정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확장재정 기조가 강한 이재명 정부에서 친명 실세 장관이 과연 재정의 속도 조절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시각이 안팎에서 적지 않다.
◇이혜훈 낙마 36일 만에 ‘친명 카드’…“실험 대신 실용주의”
이 대통령은 2일 기획처 장관 후보자에 박홍근 의원을 지명했다. 지난 1월 25일 이혜훈 전 후보자가 보좌진 갑질·부동산 투기 등 각종 의혹으로 낙마한 지 36일 만이다. 3월 예산편성지침 수립, 5월 국가재정전략회의 등 굵직한 일정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공백이 더 길어지면 예산 행정 전반에 차질이 불가피했다.
이혜훈 전 후보자 지명에 ‘국민 통합’의 명분이 깔려 있었다면, 이번 인사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박 후보자는 2022년 대선 때부터 이 대통령 캠프에서 비서실장을 맡은 친명계 핵심으로, 당 대표·원내대표와 긴밀하게 호흡을 맞춰온 인물이다. 86(80년대 학번·60년대생)세대 학생운동권 그룹의 막내 격으로, 경희대 총학생회장을 거쳐 풀뿌리 시민운동을 하다 정치권에 입문했다. 지난해 국정기획위원회에서 기획분과위원장을 맡아 기재부 분할이라는 정부조직개편을 직접 설계하기도 했다.
청와대가 이번 인사에서 강조한 키워드는 ‘안정성과 연속성’이다. 이혜훈 낙마 이후 상대 진영에서 적임자를 발탁하기 더 어려워진 현실도 이번 ‘친명 카드’를 앞당긴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을 예산 라인에 배치함으로써 실험을 반복하기보다 일할 사람을 찾겠다는 실용주의가 반영됐다는 해석이다.
◇3월 예산지침·5월 재정전략회의…‘이재명표 예산’ 속도전 본격화
박 후보자가 나라의 곳간 열쇠를 쥐게 될 시점은 예산 정치의 최대 고비와 정확히 맞물린다. 기획처는 이달 말 각 부처의 내년도 예산 요구 기준이 되는 예산편성지침을 수립하고, 5월에는 대통령 주재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준비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재정 철학과 향후 5년간 재정 운용의 기본 방향을 공개하는 자리로, 사실상 ‘이재명표 예산’의 청사진이 이 시기에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박 후보자는 이날 출근길에서 “기획예산처를 통해 30년을 내다보는 미래 전략 기능을 강화하겠다”며 “국가 대전환을 위한 전략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AI·로봇 등 초혁신경제의 성장 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또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지만 국민 혈세로 만들어진 재정을 적재적소에 쓰면서 불요불급한 예산을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언이 오히려 확장재정 의지를 드러낸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박 후보자는 “민생경제가 벼랑 끝에 서 있는 만큼 지속가능한 적극 재정의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고도 했는데, 결국 ‘불필요한 예산은 줄이되 재정은 적극 쓰겠다’는 두 마리 토끼 발언이 친명 실세 장관 체제에서 얼마나 현실성을 가질지 의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여권 일각에서 ‘벚꽃 추경’ 편성 필요성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인사가 예산 컨트롤타워를 맡게 되면, 재정 지출의 속도 조절 기능이 사실상 무력화할 수 있다는 우려다. 국가채무는 이미 1200조원을 넘어선 상태로,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50%대로 올라섰다. IMF도 한국의 재정 여력 관리를 지속적으로 권고하고 있다.
박성훈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이재명 정권의 확장재정과 대규모 국책사업이 예고된 상황에서 여당 핵심 인사를 나라 곳간 지킴이에 임명한 것은 국가 재정을 정치적 포퓰리즘에 무한 노출시킬 우려가 크다”고 했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재정 건전성을 포기한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고 날을 세웠다.
◇구윤철 부총리 ‘령(令)’ 서나…경제부처 간 균형추 흔들릴 우려
또 다른 문제는 경제 컨트롤타워인 구윤철 부총리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원래 거시경제 총괄과 경제부처 간 정책 조율은 구 부총리의 몫이다. 그런데 박 후보자는 이날 출근길에서 “대한민국 미래 설계의 중심이자 국가의 재정 컨트롤타워인 기획처 장관으로서 저성장, 인구 절벽, 기후위기, 지방소멸, 불평등과 양극화라는 구조적 복합위기를 재정을 통해 극복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경제부총리 영역에 해당하는 국가 경제 대계 설계를 기획처가 주도하겠다는 취지로 읽히는 발언이다.
구 부총리는 기재부에서 분리된 재경부를 이끌며 거시경제 전반을 총괄하는 위치지만, 출범 초기부터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여기에 이 대통령의 최측근인 박 후보자가 예산 컨트롤타워 수장으로 전진 배치되고, 스스로 국가 미래 전략의 설계자 역할까지 자임하고 나서면서 실질적인 경제 정책의 무게 중심이 구 부총리에서 박 장관 쪽으로 급격히 기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경제 관료 출신인 구 부총리가 아무리 재정 건전성을 내세워도, 대통령과 직통으로 연결된 친명 실세 장관의 목소리를 넘어서기는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구 부총리는 지난해 12월 재경부·기획처·금융위원회 수장이 함께 정책을 조율하는 3자 협의체를 매월 개최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기획처 장관 공백이 장기화하면서 협의체는 출범 이후 단 한 차례도 열리지 못했다. 박 후보자가 취임하면 협의체가 뒤늦게 가동되겠지만, 대통령과 지근거리에 있는 친명 핵심이 테이블에 앉는 구조에서 구 부총리가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협의체가 열려도 사실상 박 장관 주도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이 벌써부터 나온다.
기획처 내부에서는 기대감이 감지된다. 기획처 관계자는 “정권 내에서 확실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수장으로 오면 일하기에는 훨씬 편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혜훈 후보자의 경우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도 비호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었기에 업무 파행이 상당히 심각했을 텐데, 박 후보자가 장관으로 오면 그런 비효율은 상당 부분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50일 이상 직무대행 체제로 버텨온 조직으로선 빠른 안정이 절실했던 만큼, 중량감 있는 장관의 등장을 반기는 분위기다.
하지만 조직 안정과 국정 속도라는 내부의 기대가, 재정 건전성 훼손과 경제부처 간 균형추 붕괴라는 외부의 우려를 잠재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평가가 나온다.
박 후보자는 이날 “여야의 재정 협치도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이재명표 예산’의 설계자이자 집행자로서 정치와 재정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을지는 인사청문회의 최대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