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치솟는 환율을 잡기 위해 외환시장에 달러를 쏟아붓고 있지만, 시장은 정부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당국이 인위적으로 환율을 끌어내리면, 이를 ‘미국 주식 싸게 살 기회’로 여긴 개인 투자자들이 대거 달러 쇼핑에 나서며 다시 환율 상승을 자극하는 형국이다. 정부와 서학개미가 환율을 놓고 밀고 당기는 기묘한 ‘핑퐁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당국이 누르면 개미가 올리는 ‘환율 엇박자’
지난달 환율이 1480원 선을 위협하자 정부와 외환당국은 지난달 23일 강력한 구두 개입과 실개입을 병행했다. 이에 환율은 1420원대까지 떨어졌다. 이 기간 국내 서학개미 투자자들은 환율 하락으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미국 주식을 대거 팔아 치웠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달 말(23~31일) 국내 개인 투자자들은 4억4597만달러(약 6400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그런데 이달 들어 서학개미 투자자들은 다시 미국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달 들어 지난 12일까지 국내 개인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순매수액은 약 23억 6739만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관련 통계가 집계된 2011년 이후 같은 기간 미국 주식 순매수액 가운데 최고치로, 2011년부터 2025년 사이 연 평균 순매수액(3억4940만달러)의 6.7배에 달하는 수치다. 비교적 환율이 낮아진 지금이 달러를 싸게 사서 미국 주식을 담을 적기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A은행의 한 외환 딜러는 “당국이 시장 안정을 위해 푼 달러를 개미들이 미국 주식 매수용 실탄으로 흡수해버린 셈”이라고 말했다.
이후 환율은 다시 튀어 올랐다. 연초 1420원대였던 환율은 최근 다시 뛰기 시작했고, 지난 12일 장중 한때 1470원을 넘어섰다. 13일 오전 서울 외환시장에서 환율은 1468.5원으로 거래를 시작했고, 곧바로 장중 1470원을 뚫어냈다. 당국이 공들여 쌓은 방어선이 무력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백석현 신한은행 ST센터 팀장은 “정부가 외환보유고를 동원해 환율을 내리면, 투자자들이 환차손 위험이 줄어든 틈을 타 달러를 사들이면서 이것이 다시 환율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개입은 매수 신호” 학습된 투자자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배경에는 투자자들의 ‘학습 효과’가 있다고 분석이 나온다. 원화 약세가 구조적으로 굳어진 상황에서 정부의 개입에 의한 환율 하락은 일시적인 ‘세일 기간’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외환 딜러는 “예전에는 당국이 개입하면 투자자들이 눈치를 보며 물량을 던졌지만, 지금은 오히려 당국 개입을 저점 매수 신호로 받아들인다”며 “정부가 달러를 풀 때쯤 미국 주식을 팔아 차익을 실현했다가, 환율이 낮아지면 다시 사들이는 영리한 순환 매매 패턴이 감지된다”고 말했다.
특히 미국 증시의 견고한 상승세는 이 같은 흐름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뉴욕 증시의 3대 지수(나스닥, S&P 500, 다우존스 지수)는 인공지능(AI) 산업의 성장과 기업 실적 호조에 힘입어 각각 15~20%가량 상승했고, 3년 연속 동반 상승이라는 기록적인 성과를 거뒀다. 물론 코스피도 4000선을 뚫어냈지만, 국내 시장에서 개인 투자자들은 26조원 넘게 순매도했다. 국내 경제의 기초 체력(펀더멘털)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면서, 환율 변동성조차 미국 자산 비율을 늘리는 기회로 삼는 분위기다.
◇외환 방어 ‘실탄’ 낭비 우려도
정부도 고민에 빠졌다. 고환율은 수입 물가를 자극해 서민 경제에 타격을 주고 기업의 원가 부담을 높이기 때문에 당국으로서는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처지다. 하지만 개미들의 강력한 달러 수요가 계속되는 한 외환보유액을 동원한 시장 개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박정수 서강대 경제대학 교수는 “경제 기초 체력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없이 실탄만으로 환율을 방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달러를 풀면 개미들이 이를 사들여 해외로 유출하는 순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다면, 외환보유액만 축내고 환율 안정 효과는 거두지 못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