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대 증가폭을 기록한 내년 정부 예산안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내건 주요 공약을 이행하기 위한 예산과 이 대통령의 평소 정치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다. 주 4.5일제를 도입하는 중소기업들에게 직원 1인당 20만~25만원을 지급하는 ‘주 4.5일제 장려금’ 예산이 대표적이다.
노동계는 오랜 기간 미국, 유럽 등 주요 선진국보다 긴 우리나라의 평균 근로 시간 감축을 위해 ‘주 4일’ 근무제 도입이 시급하다는 주장을 해왔다. 결국 이 대통령은 이 요구를 전격 수용해 공약집에 ‘주4.5일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넣었다.
29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6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정부는 주 4.5일제를 도입하는 중소기업에 장려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중소기업 직원 1명당 기업 규모에 따라 월 20만~25만원을 지급한다는 것이 골자다. 주 4.5일제를 시행하면서 직원을 추가로 뽑을 경우, 신규 채용 인력 1명당 60만~80만원의 장려금을 지급하기로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중소기업의 ‘주 4.5일제’를 지원하기 위한 예산으로 277억원이 책정됐다. 기재부 관계자는 “중소기업들 중에는 임금 삭감을 하지 않으면서 직원들의 근로 시간을 줄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곳이 많다”며 “중소기업의 열악한 근로 및 재정 여건을 보완해주기 위해 도입된 정책”이라고 말했다. 신규 고용 인력에 주는 지원금은 해당 기업의 특정 기간 평균 직원 수보다 늘어났을 경우에만 지급할 방침이다. 직원 수를 줄이면서 ‘주 4.5일제’를 도입하는 기업에는 혜택을 주지 않기 위한 조치다.
내년도 예산안에는 국회 세종의사당 건립을 본격화하겠다는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내용도 반영됐다. 기재부는 “대통령 세종집무실과 국회 세종의사당 건립 추진을 위해 내년에 1196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상 부지 매입비와 설계비 등을 책정한 금액이다.
◇양곡관리법 관련 예산 4200억 책정
이밖에 정부는 최근 통과된 양곡관리법 개정안과 관련된 예산으로 4200억원 가량을 책정했다. 전략작물 직불 재배면적 확대 및 단가 인상에 들어가는 돈으로 올해(2440억원)보다 2000억원 가까이 늘었다.
정부는 농가에 직불금을 줄 수 있는 재배 면적을 17만6000ha에서 20만5000ha로 확대하고, 지원 단가를 ha당 500만원에서 550만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또한 직불금 지원 신규 품목에 수급조절용 벼와 메밀, 수수, 율무 등을 추가로 넣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과잉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는 내용이다. 쌀 시장가 교란 문제, 미국의 농산물 수입 압박이라는 수급 관리의 난제들이 산적한 가운데 “정부가 농가 표를 노리고, 농작물 매수를 계속 확대하기만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입법이다.
양곡법 개정안 관련 예산은 아직 시행령이 구체화되지 않아서 반영하지 않았다는 게 기재부 입장이다. 하지만 향후 확정될 경우, 예산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기재부 관계자는 “양곡법이 아직 시행령 등으로 구체화가 안 된 상태”라며 “이번 예산안에 그 가격을 보전하기 위해서 예산을 넣진 않았다. 다만 직불금 주는 전략 작물 품목을 늘렸는데, 그 부분이 양곡법 개정과 관련 있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인구소멸 6개 郡에 1인당 15만원 ‘기본소득’
내년 예산안에는 이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각종 현금성 바우처나 쿠폰, 기본소득 관련 예산이 대폭 자리를 잡았다. 이 대통령은 과거 성남시장 시절부터 소득, 연령 등과 무관하게 국민 모두에게 매달 현금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을 주장하고, 사실상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각종 바우처·쿠폰으로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정부가 현금 지급, 보조금, 소비 쿠폰 등을 직접적인 재정지출을 통해 시장의 총수요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평소 구상이 이번 예산안에도 녹아들었다.
1인당 15만원의 ‘농어촌 기본소득’도 시범 사업 형태로 내년부터
정부는 인구 소멸 지역 중 6개 지역을 선별해 모든 주민들에게 월 25만원의 기본 소득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해당 지자체에 지원금을 주겠다고 밝혔다. 6개 지역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농식품부에서 지자체별로 공모를 받아 선별할 계획이다. 인구소멸지역 한 곳당 평균 주민수가 4만명이어서 대상 주민수를 잠정 24만명으로 추산한 것이다. 이를 위한 예산으로 2000억원이 배정됐다. 기재부 관계자는 “현재도 경기 연천군, 전남 신안군 등 일부 인구감소 위기 지역에서 지자체가 기본 소득을 지급하는 곳들이 있다”며 “정부는 총 지원금의 40% 안에서 기본소득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6개 지역은 기본소득 지급에 대한 개별 지자체의 의지, 지역별 인구감소 위기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발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이 정책이 광역, 전국 단위로 기본소득 지급을 늘려가려는 이재명 정부의 의지가 담긴 하나의 테스트베드로 볼 수도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내년 지역화폐 24조원 발행
이재명 정부 첫 예산안인 내년 예산안엔 이재명 대통령의 대표 브랜드인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 발행을 위한 1조15000억원의 국비 지원 예산안도 담겼다. 이로써 서울(서울사랑상품권)과 세종(여민전), 대전 대덕구(대덕e로움) 등 전국 지자체들이 24조원의 지역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 내년 국비 지원액은 1조2522억원의 국비를 쓴 2021년 이후 5년 만에 가장 크다.
전통시장 등에서 쓸 수 있는 온누리상품권 발행도 대폭 지원하기로 했다. 4580억원을 지원해 총 4조5000억원 규모로 온누리상품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이밖에 230만 소상공인에 연 25만원을 주는 ‘경영안정바우처’(6000억원)도 내년 예산에 포함됐다. 경영안정바우처의 경우, 올해도 ‘부담경감크레딧’이라는 이름으로 제도가 있었다. 연 50만원의 지원금을 소상공인에 주는 것이다. 올해 예산도 1조5000억원 넘게 편성된 바 있다. 내년에 절반 가량 지원금을 줄인 배경에 대해 기재부는 “올해 수십조원의 민생 쿠폰 지급을 통해 소상공인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는 점을 감안했다”고 말했다.
전문가 대부분은 내수 부진과 통상 리스크에 따른 수출 위축 등의 경기 부진이 신음하는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저소득층 중심의 현금성 지원이 일정 부분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선거를 겨냥한 매표성 ‘현금 지원 만능주의’가 확산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국민들이 ‘현금 지급’의 달콤함에 빠지게 되면 문재인 정부를 기점으로 나랏빚이 급증한 가운데 향후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각종 의무지출 증가로 인한 국가 채무비율이 심각하게 치솟을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는 “국가 부채 급증 우려가 극심한 상황에서 6개 지역을 선별해 효과가 전혀 입증되지 않은 ‘기본소득’을 실험한다는 구상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며 “내년 예산은 2000억만 책정됐으나 이번 기본소득 실험 등이 기폭제가 돼서 큰 정치적 혼란과 지속적인 재정 유출이 일어날 가능성이 심각히 우려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