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모어 씽(One more thing).”
5일(현지시각) 미 실리콘밸리 쿠퍼티노 애플파크. 1시간 20분째 이어지던 애플의 연례 개발자 대회(WWDC) 무대에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올라 이렇게 말했다. ‘원 모어 씽’은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여러 행사에서 신제품과 신기능을 발표하며 가장 마지막에 핵심 제품을 소개할 때 썼던 말이다. 애플 행사에서 ‘원 모어 씽’이라는 말이 나온 건 수년 만이다. 팀 쿡이 원 모어 씽을 외치자 애플파크에 모인 전 세계 개발자와 미디어, 유튜버 등 3000여명은 환호성을 질렀다. 애플이 9년 만에 새로운 주요 디바이스인 혼합현실(MR) 헤드셋인 ‘비전 프로’를 공개하는 순간이었다.
애플이 2014년 스마트워치인 애플워치를 내놓은지 9년만에 새로운 주요 하드웨어인 MR 헤드셋을 공개했다. 메타(옛 페이스북)에 이어 애플도 가상현실 기기를 내놓은 것이다. 애플은 7년의 개발을 거쳐 내놓은 이 기기를 ‘혁신적인 공간 컴퓨터’라고 명칭했다. 단순한 가상현실 기기를 넘어 사용자들이 현실과 가상현실을 혼합해 새로운 디지털 경험을 체험하는 기기라는 뜻이다. 삶의 방식을 새롭게 규정하는 기기라는 뜻도 담았다. 팀 쿡 애플 CEO는 “오늘은 컴퓨팅 방식에 있어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라며 “(컴퓨터인) 맥이 개인용 컴퓨터를, 아이폰이 모바일 컴퓨팅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비전 프로는 사용자들에게 엄청난 경험과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456만원짜리 MR 헤드셋
이날 애플이 공개한 MR 헤드셋 비전 프로는 스키 고글과 유사한 형태다. 눈동자와 손, 목소리로 기기를 콘트롤할 수 있다. 비전 프로를 착용하면 실제 주변 공간과 함께 비전 프로에서 쓸 수 있는 앱이 증강현실(AR) 형태로 뜬다. 사용자가 손가락을 들어 움직이면 스크롤이 되고, 손가락 2개를 맞대면 아이콘이 선택이 된다. 눈동자 움직임도 인식해 사용자가 앱 아이콘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다. 앱은 원하는 크기로 조절할 수 있다.
기기 안에는 애플의 자체 제작 칩인 M2와 MR 헤드셋을 위해 특별히 개발한 R1 칩이 탑재됐다. R1 칩은 헤드셋에 달린 12개의 카메라와 5개의 센서, 6개의 마이크 정보를 빠르게 처리해 콘텐츠가 사용자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애플은 “R1은 눈을 깜빡이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8배 빠른 12밀리초 안에 새로운 이미지를 화면에 재현해 어지러움증을 막는다”고 했다.
가장 눈에 띄는 기능은 기기에 사용자의 눈이 보이게 하는 ‘아이사이트(Eye Sight)’다. 사용자가 콘텐츠에 집중할 때는 기기 겉면 고글 부분이 불투명으로 바뀌지만, 다른 사람이 기기를 착용한 사용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기기 고글 부분이 투명하게 되어 사용자의 눈이 보인다. 애플은 “사용자가 주변 사람들과 연결된 느낌을 유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비전 프로에는 마이크로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기술이 적용돼 2개의 디스플레이에 2300만 픽셀이 담겼다. 비전 프로를 쓰고 페이스타임(화상) 통화를 하면 상대방의 모습이 실물 크기의 디지털로 재현된다.
애플 비전 프로의 강점은 기존 애플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와 연동되고 통합된다는 점이다. 노트북인 애플 맥북의 화면을 비전 프로 내로 불러 올 수 있다. 또 비전 프로를 쓰고 클라우드인 아이클라우드 사진 보관함에 접속해 사진과 영상을 실물 크기로 볼 수도 있다. 애플은 이 기기에 새로운 홍채 인식 보안 인증 시스템인 옵틱 ID를 적용했다. 애플은 비전 프로를 개발하며 5000개 이상의 특허를 취득했다고 밝혔다. 애플은 이날 또 ‘콘텐츠 왕국’ 디즈니와의 협업도 발표했다.
문제는 가격과 배터리 용량이다. 애플은 비전 프로를 내년 초부터 미국에서 3499달러(456만원)에 판매할 계획이다. 최근 메타가 출시한 퀘스트3가 499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고가다. 국내 출시 시기와 가격은 정해지지 않았다. 비전 프로는 유선으로 이어진 배터리로 구동되는데 배터리 지속 시간이 2시간에 불과하다. 배터리를 주머니 등에 넣고 기기를 사용하는 식이다.
애플의 새로운 MR 헤드셋 비전 프로에 대한 시장 반응은 차가운 편이다. 이날 애플 주가는 행사 시작 전 상승하다가 비전 프로가 발표된 후 장중 -0.8%까지 하락했다. 이후 반등해 1.45% 상승 마감했지만 시간외거래에서 2% 하락 거래 중이다. 블룸버그는 “애플은 컴퓨팅의 미래라는 기술에 소비자들이 큰 돈을 쓸 준비가 됐는지 테스트 중”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