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기술 굴기(崛起)를 억제하고, 글로벌 반도체 패권을 다시 손에 쥐려는 미국의 공격적인 정책들이 부작용을 낳고 있다. 520억달러(약 69조원) 규모의 보조금을 약속한 ‘반도체법’은 기업 사정에 맞지 않는 독소 조항으로 비판을 사고 있고, 3년 넘게 지속된 대중 수출 규제는 자국 기업에 타격을 주고 있다.
기업들은 보조금 신청에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도 독소 조항 완화를 요구하려는 움직임이다. 미국 정부가 쏟아내는 각종 정책에 숨죽이고 상황을 살피던 분위기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19일(현지 시각)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소식통을 인용해 “대만 TSMC가 최대 150억달러(약 20조원)에 달하는 반도체 보조금을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류더인 TSMC 회장은 미국의 보조금 수령 조건들이 TSMC가 미국과 협력하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조건을 완화하지 않으면 투자 계획을 접을 수도 있다며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의 호응이 없으면 미국의 반도체 부흥 계획은 탁상공론”이라며 “기술을 쥐고 있는 주요 반도체 기업들 입장에선 미국과의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TSMC, “보조금 독소 조항 받아들이기 어려워”
TSMC는 미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5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m)와 3나노 공정의 최첨단 생산라인 2개를 건설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보조금 수령 기업에 반도체 핵심 공정 접근을 허용하고 세부 회계 장부 제출을 하라며 기업의 기술·영업 기밀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1억5000만달러 이상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예상을 웃도는 초과수익을 낼 경우 미국 정부와 이익을 나누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류 회장이 미국 정책에 불만을 나타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30일에도 “미국의 보조금 조건 중 일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기도 했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도 최근 “미국에서의 공장 운영은 대만보다 50% 더 비쌀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TSMC는 최대 고객사인 애플을 무기로 당국을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운드리(위탁생산) 산업의 특성상 TSMC의 기밀을 공개하는 건 애플의 기밀을 공개하는 것과 같은데, 애플의 사업 계획과 제품 청사진이 외부로 유출되면 미국에도 좋을 게 없다는 논리다. 대만 공상시보는 “미국은 TSMC가 절실하지만, TSMC는 미국행이 최선의 선택이 아니다”라며 “TSMC와 미국 정부 중 상대방이 더 필요한 측이 양보할 것”이라고 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신규 생산라인을 지으며 보조금 신청이 기정사실화됐고, SK하이닉스도 “미국 공장 부지 선정 절차를 완료하면 보조금을 신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역시 TSMC만큼이나 독소 조항 완화가 절실하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조건들은 절대 바뀔 수 없는 조건들은 아니다”라며 “한국 기업들도 치열한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는데, TSMC 덕분에 협상이 한층 수월해질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의 규제, 자국 기업에도 타격
미·중 갈등 속에 미국 기업들의 피해도 발생하고 있다. 19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대표 반도체 장비 업체인 램리서치는 올 1월 매출 38억7000만달러를 기록, 전년 동기 대비 4.7% 하락했다. 램리서치의 분기 매출이 역성장한 것은 3년 만이다. 여기에 올 2분기 매출 예상치도 31억달러 수준으로 시장 전망치를 하회할 것으로 보인다. 램리서치는 SMIC, YMTC 등 중국 반도체 기업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0% 안팎이다. 하지만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로 회사는 올해 연간 최대 25억달러 규모의 매출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PC 수요 하락으로 지난해 직원 약 3000명을 해고하기로 하고 긴축 경영에 돌입한 미국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HDD) 업체인 시게이트는 미국의 수출 블랙리스트에 오른 화웨이에 HDD를 판매했다는 이유로 3억달러(약 4000억원) 규모의 벌금을 받았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과도한 규제에 따른 실적 타격이 현실화되며 기업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