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우리나라의 무역 규모는 세계 7위, 수출만으론 세계 6위이다. 무역 총량을 국내총생산(GDP)으로 나눈 한국의 무역 의존도는 69.6%로 20~40%대인 미국·영국·프랑스·인도·일본 보다 높다. 이처럼 한국 경제에 생명줄과 같은 수출이 최근 흔들리고 있다.

월간 수출이 작년 10월부터 5개월 연속 감소하면서 지난달까지 12개월 연속 무역 적자가 났다. 이는 외환 위기 이후 25년 9개월만이다. 올들어 이달 10일까지 69일간 무역 적자(227억달러)는 역대 최대 적자였던 지난해 전체(472억달러)의 절반에 육박한다.

정부와 경제기관들은 “올해 수출이 작년 보다 3~5%포인트 줄어들 것”이라고 일제히 전망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1962년 ‘수출주도형(型)’ 성장 전략을 도입한 이후 60년 만에 거의 처음있는 일이다.

기획재정부는 2022년 말 발표한 '2023년도 경제 정책방향'에서 "2023년 우리나라 수출이 전년 대비 4.5% 감소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2023년 2월 23일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4차 수출전략회의'에서 2023년 수출 '목표'를 지난해 보다 0.2% 늘어난 6850억달러로 상향했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굳어진 한국의 무역 흑자 구조가 붕괴하고 있다”며 “메모리반도체 경기(景氣)와 중국 경제가 호전돼도 수출 부진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한국 수출 전선에 3개의 파도가 몰아치고 있어서다.

◇新보호주의와 ‘안보’ 논리

먼저 세계화의 퇴조로 글로벌 무역 판 자체가 바뀌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통계를 기자가 분석한 결과, 2002년부터 2011년까지 세계 상품 수출액은 182% 늘었지만 2012년부터 2021년까지는 21% 증가에 그쳤다. ‘빛의 속도’에서 ‘달팽이 속도’로 느린 세계화(slowbalization)가 고착된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2018년 미·중(美中) 무역 전쟁을 신호탄으로 자국 중심주의와 보호무역이 확산해 세계가 지역과 가치(價値)에 따라 분절(分節)하고 있다”며 “‘일직선 세계화’의 최대 수혜자이던 한국이 최대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냉전 체제 해체후 급속도로 진행된 세계화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크게 위축되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국제통화기금(IMF) 등은 이를 '슬로벌라이제이션(slowbalization)'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자유무역 수호자이던 미국이 신(新)보호주의의 선두주자로 표변(豹變)해 한국을 압박하는 게 이를 웅변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미국 정부와 의회가 2022년 합의한 공식 보조금만 4650억달러(약 605조원)로 미국 GDP의 2%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중국 견제가 본격화되면서 미국 정부의 수출 통제를 받는 중국 기업은 2018년 130개에서 지난해 532개로 4배 넘게 늘었다. 세계 총GDP에서 외국인직접투자(FDI)가 차지하는 비율은 2007년 5.3%에서 2021년 2.3%로 떨어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계기로 ‘안보’ 논리가 ‘시장’ 논리를 압도하는 것도 한국에 부정적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5월 18일(현지시간) 미시간주 디어본에 있는 포드 전기차 공장을 방문해 중국과의 경쟁을 강조하며 미국 제조업 부흥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로이터연합

김세완 이화여대 교수는 “미국과 중국이 전면적인 전략 경쟁을 벌이고 상품·원료·부품 등 공급망 재편이 추진돼 최근 20~30년 한국이 누렸던 황금기는 다시 오기 힘들다. 우리나라 수출이 더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호시절’ 끝난 對中 수출

최대 교역국인 중국이 한국을 위협하는 최고 경쟁국으로 바뀐 것도 충격이다. 중국은 1993년부터 2021년까지 우리나라에 8217억달러의 무역 흑자를 안겨준 ‘달러 박스’였다. 이는 같은 기간 한국이 거둔 전체 무역 흑자의 86%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한·중(韓中) 수교 30년 만인 지난해 우리나라가 연간 기준으로 사상 첫 무역 적자를 낸 것은 좋은 시절[好時節]이 완전히 끝났다는 증거”라고 지적한다.

이미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중(對中) 수입액은 역대 최대를 기록했고, 12개월 가운데 8개월동안 중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냈다. 이치훈 국제금융센터 전문위원은 “중국이 제조업 강국(强國) 국가 비전인 ‘중국제조 2025′를 본격화한 2016년부터 양국 경제가 보완 관계에서 경쟁 관계로 바뀌었다”며 “우리나라 10대 수출품목 중 최상위 3개를 포함한 6대 품목이 겹친다”고 말했다.

중국의 CATL은 세계 전기차 배터리 1위 기업이다. 2022년도 세계 시장점유율은 37%에 달한다. 사진은 중국 푸젠성 닝더에 있는 CATL의 배터리 공장 내부 모습/조선일보DB
2022년 12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한국과 중국의 2차 전지(전기차 배터리) 산업 경쟁력을 비교한 결과, 중국이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다./조선일보DB

중국은 디스플레이·2차전지·일반 선박에선 한국을 추월했고 스마트폰·생활가전·메모리 반도체에서 격차를 좁히고 있다. 또 중간재를 수입해 완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방식을 버리고 원료·중간재·완제품 모두 자국산 생산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다 한국 기업들이 중국 현지 공장을 동남아 등으로 대거 옮겨 중간재 수출 자체가 줄었다.

홍대순 글로벌전략정책연구원장은 “리튬·희토류 같은 핵심 원료와 중국산 부품·소재 수입을 줄이지 못한다면 오히려 한국이 대중(對中) 교역에서 만성적인 적자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2018년부터 작년까지 5년간 중국산 수입은 연평균 10.6% 늘었으나 한국의 중국 수출 평균 증가율은 3.3%에 그쳤다. 올해 1~2월 우리나라 총 무역 적자의 28%는 중국에서 생겼다.

◇퇴보하는 수출 역량

외풍을 이겨낼 주체인 국내 수출의 역량 약화도 심각하다. 이는 이명박 정부 이후 메모리반도체 호황에 도취해 단 한 개의 혁신 분야도 만들어 내지 못한 탓이 크다. ‘반도체 착시(錯視)’로 인해 10대 수출 주력 업종 구성은 10년 넘게 요지부동이고, 수출 산업의 역동성과 국제경쟁력이 모두 뒷걸음질치고 있다.

김경준 전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은 “특히 문재인 정부 5년간 한국 기업의 국내 설비 투자 증가율이 연평균 1.1%로 역대 정권 중 가장 낮았다”며 “이런 투자 부진이 산업 고도화를 늦추어 기술 경쟁력 약화와 무역 구조 악화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중간재 수출과 에너지 수입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것도 ‘아킬레스 건(腱)’으로 꼽힌다.

김경훈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총수출의 74%가 세계 수요 변동에 민감한 중간재(中間材) 품목”이라며 “경기 하강기에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과감하고 지속적인 기술·설비 투자로 중간재도 프리미엄화(化)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무역협회는 "세계 수출 시장 점유율이 0.1% 포인트 하락할 때마다 약 14만명의 국내 고용이 사라진다"고 밝혔다. 2017년 대비 2021년 고용 감소 인원은 45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석유·가스·석탄 등 에너지 수입액은 1년 전 보다 784억달러 순증(純增)해 연간 무역 적자의 최대 주범(主犯)이 됐다. 거의 모든 에너지를 수입하는 한국 입장에서 에너지 다(多)소비형 산업·생활 구조 혁파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 것이다.


◇“脫중국하는 수출 패러다임 구축하고 ‘혁신 경쟁’ 불붙게 해야”

한국의 3가지 생존법

전문가들은 ‘수출 한국’의 회생 방도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수출 패러다임 재구축이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중 신냉전과 우크라이나 전쟁 후 형성된 자유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간 대립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며 “한국 경제 성장을 지탱해온, 중국을 최대 수요처이자 공급망의 축(軸)으로 삼는 수출 패러다임을 새롭게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자유 진영국가들과 새로운 탈(脫)중국 대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며 “이 기회에 의료·금융·교육·관광 등 한국 서비스산업 역량을 제대로 키우면 돌파구가 열릴 수 있다”고 했다.

2022년 3월 24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본부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들이 모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대응과 경제 협력 방안을 논의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AP연합

두 번째는 국내 수출 기반과 체질 강화이다. 정만기 무역협회 부회장은 “중대재해처벌법 같은 반(反)기업·친(親)노조 정책 범람으로 기업들의 해외 탈출이 급증해 우리 수출의 근간이 무너지고 있다”며 “한국에만 있는 파견 및 대체 근로 불법화와 비정규직의 정규화 같은 규제 악법을 없애고 혁신 경쟁이 불붙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권의 비협조로 당장 개선이 힘들다면 기업들이 초격차 기술개발과 생산성 향상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을 하고, 고(高)금리로 고통받는 수출 기업들에 단기적으로 특혜 금리를 줘서라도 풀뿌리 수출 기반을 살려야 한다”고 했다.

세 번째는 선진국형 새 무역 전략이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는 “우리나라의 무역흑자 구조 붕괴가 어쩌면 정해진 수순(手順)일 수 있는 만큼, 제조업 중심 수출 국가 시각에서 벗어나 선진국형의 새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외국 현지에서 거둔 우리가 받은 배당·임금·이자 등 본원소득 수지와 서비스 수지에서 흑자를 내도록 국제무역과 성장 전략을 다시 짤 필요가 있다”고 했다.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
정만기 한국무역협회 상근부회장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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