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3일 금융통화위원회를 마친 뒤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이날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연 3.5%로 동결하면서 1년 반 동안 계속된 긴축 기조를 일단 멈춰 세웠다./사진공동취재단

한국은행은 23일 기준금리를 연 3.5%로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시장 전문가들의 예상이 ‘인상’과 ‘동결’로 팽팽하게 갈릴 정도로 이번 기준금리 결정 회의를 앞둔 한국 경제의 ‘방정식’은 복잡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가 “금리 인상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한 것도 인플레이션의 불씨가 살아 있는 가운데 전반적인 경기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한은의 고민을 드러낸다.

이 총재는 금융통화위원회 회의가 끝난 뒤 기자간담회에서 “금번 기준금리 동결을 ‘금리 인상 기조가 끝났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총재는 이날 간담회에서 ‘불확실성’이란 단어를 31차례나 썼다. 한국 경제의 미래에 변수가 그만큼 많아 쉽게 안심하기 어려운 상황이란 뜻이다. 이미 한국보다 높은 미국 금리와의 차이가 더 벌어질 가능성이 커진 것도 위험 요소다.

◇”다음엔 3.75%” 가능성 열어놔

이번 회의에서 기준금리 인상을 주장한 금통위원은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이 총재를 제외한 6명 가운데 5명이 “이번엔 동결을 하지만 ‘최종 금리 3.75%’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고, 나머지 1명만 현재 3.5% 수준으로 동결하는 게 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지난달 회의 때는 6명 중 3명이 연 3.5% 유지를 전망했는데, 이번 회의에서 연내 기준금리를 더 끌어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오히려 많아진 것이다.

이 총재는 이날 간담회에서 인플레이션 둔화를 뜻하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번 동결은 저희가 생각해 왔던 디스인플레이션의 경로로 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했다. 이달 초 기준금리 인상 폭을 통상적인 0.25%포인트로 되돌린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디스인플레이션을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이 단어를 썼는데, 한은 총재도 같은 맥락의 발언을 한 셈이다.

문제는 인플레이션이 아직 심각한 수준이란 점이다. 이 총재도 “다만 (물가가 억제될지) 굉장히 많은 불확실성이 있어서, 우리 생각보다 물가가 빨리 안 내려오면 금리를 더 올릴 수도 있다”고 했다. 한은은 국내 소비자 물가가 2월엔 5% 내외로 떨어진 뒤 3월부터는 4%대로 낮아지고, 연말쯤 3% 초반으로 더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미국 강달러 현상에 따른 수입 물가 상승, 중국의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으로 인한 유가 상승, 공공요금 인상 등 물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불안 요소가 산적해 있는 상태다. 미국도 파월의 ‘디스인플레이션’ 발언 후 잇달아 물가가 반등한다는 지표가 나와 시장에 충격이 발생했었다.

◇불어난 가계 부채, 오르는 환율도 부담

국내 경기도 낙관하기 힘든 상황이다. 한국 경제는 반도체·중국·에너지 등 ‘트리플 악재’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경제 버팀목인 수출이 5개월째 연속 감소세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17일 이례적으로 ‘경기 둔화’를 공식화했다. 이 와중에 한은이 금리를 추가로 올려 경기 회복 노력에 찬물을 끼얹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잠시 숨 고르기 하면서 ‘물가’와 ‘경기’ 사이 상황을 지켜볼 수 없었다는 얘기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초저금리에 투자 열풍이 겹쳐 세계 최고 수준으로 불어난 가계 부채도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변수다. 한은 분석에 따르면 기준금리가 0.25%포인트 오르면 가계 부채의 이자 부담액이 3조3000억원 정도 늘어난다. 갚아야 할 이자가 커지면 가계의 소비 여력이 줄면서 안 그래도 식어가는 경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물가 통제가 목적인 한은이 공식적으로 경기를 고려했다고 말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며 “이번엔 워낙 금리가 높아 기업·가계가 힘들었던 점을 고려했을 것 같다”고 했다.

최근 다시 1300원을 오르내릴 정도로 상승한 달러 대비 원화 환율도 한은엔 부담이다. 한국 금리가 미국 등 다른 나라보다 지나치게 낮으면 원화의 상대적 가치가 약해지면서 환율이 오를 수 있다. 상대적 금리가 낮은 데다가 원화 가치까지 내려가면 자본 유출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만약 환율이 오르고, 경상수지가 악화되는 상황에 강달러 상황이 지속되면 금리 자본 유출 압력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