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3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정기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금통위 위원들은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마스크를 벗고 회의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한국은행이 23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기준금리를 현 수준인 연 3.5%로 동결했다. 국내 경기 둔화와 부동산 가격 하락 등을 고려해 작년 4월 이후 7번 연속 올렸던 금리를 이번에 묶어두기로 결정했다.

이날 이창용 한은 총재는 금통위 정례회의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목표 수준을 웃도는 물가 오름세가 연중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정책 여건 불확실성도 높다”며 “인플레이션 둔화 속도와 불확실성 요인들의 전개 상황을 점검하면서 추가 인상 필요성을 판단해 나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다”고 동결 배경을 밝혔다.

다만 이 총재는 “이날 동결 결정이 금리 인상 기조가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물가가 이례적으로 급등해 매회 금리를 인상했지만, 그 이전 시기에는 인상하더라도 시간을 두고 추가로 인상할지를 검토해왔다”고 설명했다.

한은은 앞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경기 침체가 예상되자 빠른 속도로 기준금리를 인하했다. 2020년 3월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 낮추는 ‘빅컷’에 나섰고, 두 달 뒤 추가 인하(0.25%포인트)로 2개월만에 금리를 0.75%포인트 내린 것이다. 이후 아홉 번의 동결 과정을 거친 뒤 지난해 8월, 15개월 만에 0.25%포인트를 올리며 이른바 ‘통화정책 정상화’에 나섰다. 이후 기준금리는 지난해 1·4·5·7·8·10·11월과 올해 1월까지 0.25%포인트씩 여덟 차례, 0.50%포인트 두 차례, 모두 3.00%포인트 높아졌다. 이번 동결로 2021년 8월부터 지난달까지 1년 5개월 동안 이어진 금리 인상 기조가 깨졌다는 해석이다.

한은이 이번에 인상보다 동결에 방점을 찍은 것은, 불안한 국내 경기 상황에 대한 고려가 컸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한국 경제는 반도체·중국·에너지 등 ‘트리플 악재’로 휘청이는 상황이다. 주력 수출 상품인 반도체와 최대 수출국인 중국 수출 부진이 장기화하면서 경제 버팀목인 수출이 5개월 연속 감소하고 있다. 이에 기획재정부가 지난 17일 경기 둔화를 공식 인정할 정도로 경기가 하강 국면인데, 기준금리를 추가로 올릴 경우 향후 경기 침체 가능성이 그만큼 커질 수 있었다. 한은으로써는 추가 긴축 부담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가계부채가 코로나 팬데믹 기간 초저금리와 투자 열풍으로 크게 불어난 가운데 기준금리를 지나치게 올릴 경우 많은 가계의 이자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금리를 더 올릴 경우 부동산 시장 경착륙에 따른 금융 시장 충격까지 연쇄 파장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번 금리 동결은 물가보다는 경기를 더 강조하는 정부 방침에 보조를 맞춘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앞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만약 물가 안정 기조가 확고해지면 모든 정책 기조를 경기 쪽으로 턴(turn·전환)해야 한다”며 경기 방어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 금리를 동결하면서 한·미 금리 역전폭 확대에 대한 리스크는 더욱 커지게 됐다. 한국 기준금리는 연 3.5%로 유지되지만, 미국은 금리 인상 기조가 아직 꺾이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4.75%인 미국 기준금리는 3월은 물론 5월과 6월까지 0.25%포인트씩 차례로 올라 5.5%까지 오를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한·미 금리차가 2%포인트 안팎 역대 최대치로 벌어질 수 있고, 외국인 자금 유출이나 원화의 상대적 가치 하락(환율 상승) 압력 등과 같은 후유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날 이 총재는 최종금리를 더 올릴 가능성도 시사했다. 그는 “이번 회의에서 금통위원 1명은 최종금리를 현 3.5% 수준에서 동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한 반면, 나머지 5명은 당분간 최종금리를 3.75%로 가져갈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한편 한은은 이날 ‘수정 경제전망’을 내놓고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도 기존 1.7%에서 1.6%로 0.1%포인트 낮췄다. 세계 경제 침체 우려가 여전한 가운데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성장률 전망을 더 낮춘 것이다. 이 총재는 “미국과 유럽의 경기 연착륙 가능성, 중국의 경기 회복 등으로 상향 조정 요인이 0.2%포인트 있었지만, 국내 IT 경기 부진과 부동산 경기 둔화 등 하향 요인이 -0.3%포인트 있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앞서 이 총재는 지난 1월 기준금리 발표 뒤 기자회견에서 “지난해 11월에는 (올해 한국 성장률을) 1.7%로 봤는데, 한 달 좀 넘었지만, 그 사이의 지표로 볼 때 성장률이 그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클 것 같다”고 한 바 있다. 한은은 이번에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을 3.6%에서 3.5%로 0.1%포인트 소폭 낮췄고, 2024년 경제성장률은 2.4%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