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외환보유액 4232억 달러(약 532조원) 중 약 4분의 1을 외부 기관에 위탁 운용한다. 이 위탁자금의 10%까지 국내 토종 운용사들에게 맡겨 국내 금융사들의 실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할 계획이다. 사진은 서울 명동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화를 정리하는 모습./뉴시스

한국 경제의 ‘비상금’으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외환보유액 가운데 미래에셋·삼성 등 토종 자산운용사들이 맡아서 굴리는 금액이 급증했다.

한은은 세계 9위 수준인 4232억달러(약 520조원, 작년 말 기준)의 외환보유액 가운데 일부를 오랫동안 블랙록, 핌코 ,슈로더 등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에 맡겨왔지만, 국내 자산운용사 위탁 비율을 높여가고 있다.

7일 한국은행 외자운용원에 따르면, 지난 4년간 한은이 국내 운용사에 위탁한 금액이 4억달러에서 30억달러가 돼 8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투자 대상도 중국 주식 일변도에서 벗어나 지난 2019년부터는 주요국 주식과 채권으로 확대됐다.

작년 말 기준 국내 운용사 위탁 비율은 전체 위탁 자산의 3.9%(30억3000만달러)로 높아졌고, 앞으로 이 비율을 10%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장기투자 성격의 안정적 자금을 국내 운용사들에도 맡겨 토종 펀드의 실력을 키우는 ‘마중물’ 역할을 하도록 할 계획이다.

◇국내 자산운용사 비율 높인다

한국은행의 외화자산 중 10%는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성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고, 65.7%는 한은 외자운용원이 직접 굴리고 있다. 나머지 24.3%의 경우 절반 정도는 국부펀드인 한국투자공사(KIC)에 맡겼지만, 나머지 절반은 한은이 국내외 자산운용사 등을 선정해 굴리고 있다.

한국투자공사(KIC)는 대부분 해외 전문 기관에 투자를 맡긴 상태고, 한은도 KIC에 맡기지 않는 금액을 주로 글로벌 운용사들에 위탁했다.

그러다 지난 2012년부터 국내 자산운용사들에도 일거리를 주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이 해외 투자자들에게 증시를 개방하면서 중국 내 적격 외국인 기관투자자 자격(QFII)을 부여했는데, 이 자격을 가진 국내 운용사에 중국 주식·채권 운용을 맡기면서 물꼬가 트였다. 당시에는 전체 위탁 자산의 0.2% 수준에 불과했다.

외자운용원 관계자는 “최근 기술주가 급락했지만, 나스닥 주식형 펀드를 위탁 운용했던 국내 운용사 중에는 2021~2022년 벤치마크(나스닥 지수) 대비 초과 성과를 올린 곳도 있었다”면서 “잘하는 곳이 많아질수록 단순히 주가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 전략뿐만 아니라 액티브 운용도 맡길 계획”이라고 전했다.

◇해외 운용 규모, 5년 새 두 배

펀드 시장이 위축되면서 국내에서 뭉칫돈을 유치하기 어려워진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국은행이 돈을 굴려달라고 맡겼다는 사실은 해외 국부펀드 등 ‘큰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해외 자금을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작년 말 기준 미래에셋, 삼성, KB, 한화, 신한 등 자산운용사들이 한은 외환보유액을 운용 중이다. 이들을 포함해 위탁 기관에 선발되려는 국내 운용사들은 치열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벌인 끝에 자금을 따낸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미국 법인에 해외 채권팀을 설립해 운영 중이고, 해외 자산운용사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자금 운용 능력을 갖췄다는 점 등을 내세워서 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다른 운용사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리스크 관리 능력을 갖췄고, 외국 자산운용사에 위탁하는 것보다 제반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점 등을 강조해서 한은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NPS)이나 한은의 외국환평형기금을 맡아 운용하는 KIC는 여전히 일부 자금만, 그것도 중국 투자 위주로 국내 자산운용사들에 맡기고 있다. 해외 투자의 ‘본류’라 할 수 있는 선진국 투자는 여전히 미국 등 해외 기관에 일임하는 중이다.

서유석 금융투자협회장은 “국내 자산운용사들이 최근 5년 새 해외 투자펀드 설정액이 2배 늘어나는 등 실력과 규모가 외국 회사들과 견줘 뒤지지 않는다”며 “한국은행이 물꼬를 텄으니 국민연금과 KIC도 국내 운용사들에 더 많은 기회를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