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자리 바뀐 가격 - 서울 시내 한 식당 메뉴판에 인상된 가격을 임시로 적은 종이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곡물 생산량이 많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전쟁이 발생한 영향으로 식료품 가격이 최근 급등하고 있다. 3일 통계청에 따르면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3년 9개월 만에 가장 높은 5.4%를 기록했다. /뉴시스

생산, 투자, 소비 등 경제의 3대 축이 일제히 마이너스 성장으로 곤두박질치고, 수출로 지탱하는 경제 구조에서 무역 수지가 2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하는 등 경제 위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올 들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인플레이션의 불길이 번지면서 국민들이 체감하는 물가는 무섭게 뛰고 있다. 3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3년 9개월 만의 최고인 5.4%까지 치솟았다. 이런 상황은 6~7월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이처럼 뛰는 물가를 잡기 위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시장 금리도 뛰고 있다. 한국 경제의 이 같은 불안감이 반영되면서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2년여 만의 최고 수준까지 오르고, 단기적인 경제 충격마다 급등락을 거듭하는 등 위기감도 커져가고 있다.

(성남=뉴스1) 이재명 기자 =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판교 제2테크노밸리 기업지원허브를 찾아 3D 프린트기로 만들어진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공동취재) 2022.6.3/뉴스1

100% 수입에 의존하는 원유 등 국제 에너지 가격이 치솟아 실물 경제가 타격을 받고,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이 기업과 가계의 발목을 잡는 악순환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창문이 흔들리고 마당의 나뭇가지가 흔들린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3일 발언은 이런 위기감을 대통령이 직접 느낄 만큼 커졌다는 것이다.

발등의 불은 물가 급등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석유류는 34.8%나 급등했다. 특히, 경유는 상승률이 45.8%에 달했다. 밀가루(26%), 돼지고기(20.7%) 등도 오름세가 가파르다. 전기·가스·수도는 2010년 1월 통계를 집계한 이래 최고 상승률(9.6%)을 보였다. 현대경제연구원은 6~7월 중 물가가 6% 이상 오를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물가 대책 효과 제한적

기획재정부는 7월 말 종료되는 유류세 30% 인하 조치를 10월 말까지 추가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탄력세율을 동원해 유류세 인하폭을 37%로 확대하는 카드도 꺼낼 수 있다. 국토교통부는 공공 교통요금 관리를 강화하고, 공공 임대주택 임대료 동결 연장도 검토키로 했다.

하지만 물가 상승이 나라 밖에서 불어닥치는 압력 때문이라 정부 정책만으로 잡기 힘든 상황이다. 유로존의 5월 물가(8.1%)는 1997년 관련 통계 집계 이래 최고치였고 미국도 8%대로 40여 년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민생 안정 대책에 포함된 물가 대책은 관세나 부가가치세를 면제해 가격을 낮추는 방식인데 관세 면제의 경우 시차가 존재한다. 캐나다산 돼지고기의 경우 선박으로 한국까지 오는 데 한 달 정도 소요된다. 감세 혜택을 본 기업들이 판매 가격을 내릴지도 불투명하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최근 6개 경제단체와 만나 “가격을 올리지 말고 생산성 향상 등으로 가격 상승 요인을 최대한 흡수해 달라”고 했다.

◇외환위기·금융위기보다 극복 어려울 수도

1998년 외환 위기 직후 한국 경제 성장률은 -5.1%였지만, 세계 경제는 2.6% 성장하는 등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대규모 부실 기업 정리 등으로 충격을 받았지만, 수출 확대로 한국은 다음 해 곧바로 11.5% 반등에 성공했다.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 세계 경제는 미국과 유럽 등의 충격으로 성장률이 -0.1%를 기록했지만, 한국은 0.8% 성장하며 선방했다.

하지만 올해는 한국과 세계 경제가 모두 하강세를 보일 전망이다. 전년과 비교했을 때 성장률이 반 토막이 날 것으로 보인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작년 6.1% 성장한 세계 경제는 올해 3.6%로 둔화되고, 한국의 성장 속도도 작년(4%)보다 크게 느려진 2.5%에 그칠 전망이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외환 위기 때에는 세계 경제가 좋아서 빠르게 회복했고, 2008년 금융 위기 때에는 중국이 저가 공급을 해줘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됐다”며 “하지만 지금은 중국이 코로나 봉쇄령에 갇혔고 중국을 대체할 나라를 찾기 힘든 상황이라 더 심각한 위기라고 볼 수도 있다”고 했다.

◇규제 개혁으로 기업 투자 유도해야

전문가들은 정부가 풀 수 있는 규제를 신속히 풀어 기업들이 생산을 늘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는 “기업 활동을 촉진시킬 수 있도록 규제들을 대대적으로 걷어내면 위기 탈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의 법 개정을 기다리지 말고 정부가 시행령 개정으로 할 수 있는 규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3일 경기 시흥시 한 중소기업을 방문해 “‘투자 주도 성장’이 경제 정책의 큰 목표”라며 “기업을 자유롭게 해 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추 부총리도 이날 판교 제2테크노밸리를 찾아 “불필요한 규제를 혁파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