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유럽의 전기차 장려 정책이 후퇴하고 내연기관차 수요가 예상보다 오래 이어지는 가운데,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이 전기차 전략 수정 과정에 최근 1년간 최소 750억달러(약 110조원)에 달하는 비용을 떠안았다는 분석이 나왔다. 공격적인 전동화 투자로 공장과 설비를 바꿨다가 다시 내연차·하이브리드 생산으로 방향을 틀면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 것이다.
22일(현지 시각)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소 12개 글로벌 완성차 업체가 전기차 계획을 축소하거나 연기하면서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지난해 10월부터 전기차 세액공제(보조금) 혜택을 종료했고, 유럽도 내연차 금지 시점을 늦추면서 전기차 수요 증가세는 둔화했다.
고급차 브랜드들까지 전기차 속도 조절에 나선 점도 상징적 변화로 평가된다. 롤스로이스는 2022년 첫 전기차 ‘스펙터’를 공개하며 2030년까지 전 차종을 전기차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계획을 사실상 철회하고 V12 내연기관 생산을 연장하기로 했다. 크리스 브라운리지 최고경영자(CEO)는 영국 더타임스 인터뷰에서 “(2022년) 당시에는 맞는 판단이었지만 지금은 법규와 시장 환경이 달라졌다”며 “고객 수요를 고려해 내연기관을 더 오래 유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람보르기니도 첫 순수 전기차로 준비하던 ‘란자도르’ 출시를 취소하고, 주력 모델을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중심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스테판 빈켈만 람보르기니 CEO는 “시장과 고객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규모 전기차 투자를 강행하는 것은 재정적으로 무책임하다”며 “현재 전기차 수용 속도는 기대보다 훨씬 느리다”고 밝혔다.
대형 완성차 업체들도 잇따라 전기차 투자 속도를 늦추고 있다. 혼다는 2040년까지 모든 차량을 전기·수소차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수정하고, 북미용 중저가 전기차 3종 개발을 취소했다. 공장 설비 변경 등으로 발생한 비용 157억달러(약 23조원)를 손실로 처리했고, 당분간 하이브리드와 내연기관 차량 판매 비율을 유지하기로 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전기차 사업에서 추가로 60억달러(약 9조원) 손실이 발생했다고 밝혔고, 전기 픽업트럭 생산 계획을 조정하는 대신 내연기관 픽업과 하이브리드 생산을 늘리고 있다. 스텔란티스도 전기차 수요 둔화 여파로 220억유로(약 38조원) 규모 비용을 손실로 반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