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시대의 경쟁 법칙이 ‘공간과 활용성’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글로벌 완성차 업계의 해답이 PBV(목적 기반 모빌리티)로 모아지는 가운데, 기아가 이 새로운 격전지에서 성가를 높였다. 기아의 중형 전기 PBV인 ‘PV5’가 19일(현지 시각) 세계 상용차 박람회인 솔루트랜스에서 ‘2026 세계 올해의 밴’으로 뽑힌 것이다. 이 상은 유럽 각국의 상용차 전문 기자단으로 구성된 비영리 기관이 1992년부터 34년째 시상해 온 것으로, 한국 차의 수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시아 전체로 봐도 일본 닛산(1993년·2010년) 외에 역대 세 번째다.
PV5는 미국 포드의 전기 밴 ‘E-트랜짓’, 독일 폴크스바겐의 크래프터와 트랜스포터, 중국 지리의 ‘파라이즌 SV’ 등 최종 후보 여섯 모델을 따돌리고 심사위원 26명의 만장일치로 1위에 올랐다. 올해 12개국 이상에서 판매를 개시한 경상용 차량 중 최종 후보에 오른 7개 차량을 평가단이 직접 타보며 평가했다. 상용차의 본고장 유럽에서 한국이 제시한 미래 모빌리티의 표준이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잘라스 스위니 심사위원장은 “PV5는 우수한 성능, 효율적인 전기 플랫폼, 사용자 중심의 설계로 심사위원단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했다.
◇미국·독일·중국도 제쳤다
PV5는 2020년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장기 미래 전략에 따라 개발이 추진된 차종 중 하나다. 당시 그룹 수뇌부는 전기차와 자율 주행 등 다양한 기술이 자동차 산업에 빠르게 도입되는 상황에서, 기존 제품만으로는 미래 시장을 공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현대차는 제네시스를 중심으로 한 고급 브랜드로 확장하고, 기아는 실용성 높은 PBV 시장을 공략하는 장기 전략이 세워졌다. PBV는 아직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이 없어 더 유망하다고 봤다. 이후 5년간 기아가 개발해 지난 6월 내놓은 첫 PBV가 PV5다.
PBV는 전기차의 장점을 극대화한 다목적 차량이다. 일반 밴처럼 생겼지만 운전석과 조수석을 제외한 차량 실내를 입맛대로 구성할 수 있다. 전기차는 엔진·변속기가 없고 연료관이나 배기구도 필요 없다. 배터리는 차체 바닥에 깔기 때문에 그 위 공간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다. 기아는 배터리를 스케이트보드 모양으로 바닥에 얇게 까는 PBV 전용 플랫폼(차량 뼈대)도 개발했다. 운전석 뒤 공간을 캠핑카, 승합차, 배달 차량, 푸드트럭, 사무실 등 다양한 목적으로 변모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기아는 지난 14일 준공한 경기 화성의 PBV 전용 공장 ‘이보 플랜트(EVO Plant)’에서 PV5를 포함해 향후 연간 25만대의 중·대형 PBV를 생산해 시장 점유율을 높일 계획이다. 이 공장에선 사용 목적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다른 PBV의 특성을 반영해 하나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다양한 PBV를 동시에 생산할 수 있는 셀(Cell) 생산 방식도 도입했다.
◇PBV ‘공간 활용력’ 경쟁하는 글로벌 제조사
전기차 시장은 미국 테슬라가 주도하고 있지만, PBV 시장은 아직 압도적인 1등이 없다. 자율 주행 기술이 더 진보하면 자동차는 이동 목적뿐 아니라 일이나 여가, 부업을 위해 다양하게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PBV가 시장 트렌드를 주도할 것이라는 얘기다.
해외 기업들도 PBV 모델을 앞다퉈 개발하고 있다. 미 포드의 상용차 브랜드 포드 프로는 지난 7월 “전기 밴인 E-트랜짓 커스텀의 신규 사륜구동 모델을 내년 봄 공식 출시하겠다”고 밝혔다. GM도 다목적 상용차 브랜드 엔볼브(Envolve)에서 새 전기 밴을 개발 중이고, 독일 폴크스바겐은 기존 트랜스포터 밴을 가솔린·디젤과 순수 전기 등 여러 파워트레인 모델로 다양화했다. 중국 지리자동차도 한 번 충전에 최대 주행거리가 400㎞에 달하는 수퍼밴 모델을 선보였다. 일본 도요타는 PBV ‘카요이바코’를 개발 중이다. PV5와 유사한 네모난 박스카 형태로 스쿨버스, 푸드트럭, 사무실 등 여러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는 특징을 내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