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부족에 따른 신차 공급난으로 차를 받으려면 1년여씩 기다려야 하고, 차량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던 자동차 시장이 최근 180도 바뀌고 있다. 출고 대기 기간이 크게 줄어들고 일부 모델은 재고가 쌓이면서 완성차 업체들이 할인 경쟁에 돌입하고 있다. 반도체난은 완화되는데 금리 급등과 경기 불황으로 신차 수요가 급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구매 플랫폼 직카가 작년 9월 집계한 전국 신차 재고 물량은 평균 1402대였는데, 18일 현재 3339대까지 늘었다. 한민우 직카 대표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신차가 부족해 인기 모델은 프리미엄이 붙었는데 고금리가 자동차 시장을 한순간에 바꿔놨다”며 “주식·코인·부동산을 사놓으면 ‘돈 복사’ 되던 시절이 가고, ‘돈 삭제’의 시대가 오자 차량 구매 수요도 급감했다”고 말했다.
◇출고 대기 기간 확 줄었다
주문량이 200만대에 달한다는 현대차·기아도 비인기 모델을 중심으로 재고가 쌓이고 있다. 경차인 캐스퍼와 모닝, 그리고 대형 SUV인 모하비는 즉시 출고 가능한 재고가 수백 대씩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 대형 SUV인 팰리세이드는 디젤 모델은 한 달, 가솔린 모델은 3개월 내에 출고가 가능하다. 기아 쏘렌토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10개월의 대기가 필요했지만, 이달 주문하면 5개월이면 받을 수 있다. 인기 모델은 대기 기간이 여전히 길지만, 할부 금리를 감당하지 못해 계약을 취소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즉시 출고 가능 차량들도 나오고 있다. 현대차 한 딜러는 “신형 그랜저는 공식 대기 기간이 10개월이지만, 계약 취소 물량이 꽤 있어 곧바로 받을 수 있는 차량이 있다”고 말했다.
인기 수입차 모델들조차 재고가 쌓이고 있다. 수입차 업계에 따르면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다 판매 모델인 E클래스의 주요 모델(E250, E350)도 즉시 출고가 가능하다. BMW 역시 5시리즈를 포함한 다수 모델의 재고가 400여대 쌓여 있다. 아우디의 경우 인기 세단 A6의 가솔린 모델을 제외한 모든 모델들이 즉시 출고 가능하다.
◇할인 경쟁 본격화
현대차는 지난 연말 1000대가 넘는 캐스퍼 재고를 해결하기 위해 최대 150만원의 할인을 단행했고 이달에도 신년 기획전으로 최대 100만원 할인하고 있다. 수입차 업체들도 할인을 늘리고 있다. BMW는 5시리즈 할인 폭을 지난달 최대 1000만원에서 이달 1250만원까지 늘렸다. 아우디는 이달 A4, A5 모델을 19%(최대 1400만원)까지 할인 판매하고 있다. 수입차 업계 관계자는 “할인이 시작된 초기에 반짝 판매가 늘었지만, 올해부터 경기 침체가 본격화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면서 소비 심리도 크게 위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향후 재고가 지속 증가할 경우 자동차 업계의 가격 경쟁이 더 심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미 미국에선 딜러 인센티브가 급등하고 있다. 고객 할인폭이 커진다는 의미다. 지난해 상반기 미국에서 다수 완성차 업체들은 딜러 인센티브를 1000달러(약 123만원) 이하로 유지했지만, 지난달 대부분 1000달러 이상으로 올렸다. BMW는 전달 대비 30% 올린 1766달러, 폴크스바겐은 14.5% 올린 1704달러, 현대차는 9.8% 올린 1076달러를 딜러에게 지급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테슬라가 최근 차량 가격을 최대 20% 인하하는 치킨 게임을 시작했다”며 “올해 완성차 업체들의 수익성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