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신생 전기 픽업 메이커 리비안은 지난달 상장과 동시에 내연기관차 시장 100년의 강자였던 미국 GM과 포드의 시가총액을 단숨에 추월했다. 리비안의 시가총액은 세계 5위 현대차 시가총액의 2.5배로 뛰어올랐다. 애플·알리바바·화웨이·샤오미 같은 IT 강자들도 전기차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소프트웨어 기술로 무장한 이들은 애플이 아이폰을 위탁 생산하듯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퀴 달린 스마트폰’을 찍어내겠다는 것이다. 세계 자동차 산업 판도가 격변하고 있다.
반면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지난 10년간 5위를 지켜왔던 현대차그룹은 전기차 시장에선 작년 5위에서 올해 상반기 6위로 내려앉고, 점유율도 7%에서 4%대로 줄었다. 전기차 시장은 2030년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20~25%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만큼 급속히 커지고 있지만 현대차의 파이는 오히려 쪼그라들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는 전기차 대규모 공장도, 공개된 공장 건설 계획도 아직 없다. 세계 5대 메이커 중 전기차 전용 공장 계획조차 없는 곳은 현대차를 빼면 하이브리드 전기차 최강자인 세계 1위 도요타뿐이다. 전기차 시대 청사진 면에서 현대차는 가장 뒤처져 있는 셈이다.
◇앞서가는 테슬라, 전기차 올인한 자동차 기업들
현대차가 내연기관 시장과 전기차 시장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전기차 강자들은 질주하고 있다. 지난해 50만대를 판 테슬라는 올해 그 2배인 100만대 판매를 목전에 두고 있다. 중국 상하이차그룹은 올해 전기차만 50만대 이상 판매할 전망이다. 내연기관차에선 명함도 못 내밀던 이 업체가 GM과 폴크스바겐 합작으로 축적한 기술력으로 전기차 시장 선두권을 차지한 것이다. 중국 BYD는 전기차 핵심 부품인 배터리까지 직접 생산할 수 있다는 강점 덕분에 최근 테슬라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중 하나로 떠올랐다. 반면 현대차그룹은 올해 전기차 20만대, 내년 30만대 판매를 예상하는 수준이다.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자동차 기업들의 인력 구성도 IT 기업처럼 개발자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하고 있다. 부품 수가 급감해 노동력 수요가 줄어드는 대신 소프트웨어와 배터리 기술이 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폴크스바겐과 GM·포드는 수년 전부터 대대적인 인력 구조 조정을 시작해 생산직 감원을 완료하고 연구 인력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려왔다. 이항구 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포드와 폴크스바겐은 최근 본사 소프트웨어 인력을 과거 수백 명에서 최근 4000~5000명 이상으로 늘렸고, GM은 최근 미국 내 사무·연구직 숫자가 생산직 숫자를 넘어섰다”며 “단순 감원을 한 게 아니라, 인적 구성을 완전히 바꾸는 체질 개선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력 개편 전쟁에서도 한국은 뒤처져 있다. 국내 차량용 반도체 소프트웨어 고용 인력은 1000명 미만이다.
◇현대차 전기차 공장 청사진 없어
전기차 공장 청사진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현대차는 이른바 ‘혼류(混流) 생산’에 의존하고 있다. 내연기관차를 만드는 울산 1공장에서 주력 전기차인 아이오닉5, 코나 전기차를 함께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제네시스 차세대 전기차 GV60는 울산 2공장에서 제네시스 내연기관 모델들과 뒤섞여 생산 중이다. 기아 EV6 역시 마찬가지다. 내연기관차와 같은 생산 방식으로 전기차를 만드는 것이다.
2025년 전기차 100만대 판매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기차 전용 공장 건설이 시급하지만 현대차는 아직 노조와 본격적인 협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작업 인력 감축, 전환 배치 등 노조가 민감하게 여기는 사안에 명확한 협상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세계 2위 자동차업체 폴크스바겐은 33만대 규모의 전기차 공장이 있지만, 지난달 “독일 본사 인근에 테슬라보다 효율적인 첨단 전기차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세계 4위이자 미국 최대 자동차 업체 GM은 미시간주 햄트랙 공장을 전기차 공장으로 탈바꿈시켜 전기 픽업트럭 생산을 시작했다. 포드도 미시간주에 ‘루즈 전기차 센터’를 새로 지어 미국 인기 픽업트럭 F150 전기차 모델을 다음 달 본격 생산한다. 1900년대 초반 자동차 대량생산 체제를 최초로 도입한 포드는 당시 세계 최초의 대중 자동차였던 ‘모델T’ 시대 이후 완전히 새로운 전환기가 왔다고 보고 대대적인 변신을 시작했다.
자동차업계 고위 관계자는 “완전히 새로운 판이 짜이고 있는 상황에선 선택과 집중, 그리고 속도가 중요하다”며 “폴크스바겐과 벤츠 등 글로벌 기업들도 수소차를 포기하고 전기차에 올인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