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폴크스바겐·현대차 등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이 전기차로 진격을 선언하면서 자동차 산업의 지각 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기존 자동차 기업들이 대대적인 투자와 구조 개편 계획을 밝힌 가운데, 애플·샤오미·폭스콘 등 IT 공룡 기업들도 강력한 소프트웨어 기술과 스마트폰 등 전자제품을 만들며 쌓은 제조 역량을 앞세워 전기차 시장 진입 기회를 엿보고 있다. 100년 기술이 축적된 엔진이 사라지는 전기차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의 대표 주자인 현대차는 지난 2일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를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청사진만큼은 업계 선두권에 합류했다. 하지만 현재 수준의 경쟁력에 안주했다가 새로운 경쟁자들이 무수히 등장하는 전기차 시대에 고전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아가 지난달 27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문을 연 전기차 체험 공간‘EV6 언플러그드 그라운드’를 찾은 방문객들이 전시된 EV6의 내·외장을 살펴보고 있다. 한국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현대차·기아는 전기차 전환 속도를 높이고 있지만, 기존 완성차 업체가 아닌 애플 같은 새로운 경쟁자가 계속 나타나고 있어 압도적인 기술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할 상황이다. /연합뉴스

◇현대차·기아 전기차 특허 5위, 도요타 1위

최근 일본 닛케이신문이 특허조사기관 페이턴트리설츠와 공동으로 지난 7월 기준 미국에 등록된 전기차 특허 보유 현황을 조사했다. 경쟁사의 특허 인용 건수, 특허심판 제기 건수 등 특허 중요도를 반영해 점수화한 결과, 현대차와 기아는 각각 1694점, 911점을 받아 10위와 20위에 올랐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차·기아가 남양연구소에서 연구 역량을 공유하고, 특허를 나눠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글로벌 5위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1위 도요타와의 점수(8363점) 격차는 매우 컸다. 2~4위는 포드·혼다·GM 순으로 모두 전기차 전환을 서두르는 기업들이다. 포드는 2025년까지 전기차에 220억달러(25조4500억원)를 투자한다고 했고, GM은 2025년 전기차 100만대 판매를 하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전기차 업체 테슬라는 8위에 올랐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도요타가 아직 전기차 생산을 본격화하지 않지만, 단숨에 판을 뒤집을 수 있는 기술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미국에 특허 등록·공개가 사실상 봉쇄된 BYD 등 중국 자동차 기업을 포함하면 현대차의 특허 역량은 더 뒤 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전기차 특허 경쟁력 상위 기업

◇한국 전기차, 핵심 경쟁력은 확보

전기차 경쟁력의 가장 핵심인 배터리 분야에서 LG·SK·삼성 등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기업들이 포진해있는 것은 큰 경쟁력이다. 전기차 구동 시스템을 만드는 현대모비스, 그리고 최근 시장에 뛰어든 LG마그나 등 경쟁력 있는 부품사들도 꽤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차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E-GMP)은 90% 이상 국내 기업들과 협력해 개발한 국산 제품”이라며 “전기차 핵심 경쟁력은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차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적용한 최초 전기차인 아이오닉5를 지난 4월 출시했다. 현재까지 전용 플랫폼을 개발해 전기차를 양산한 전통 완성차 업체는 폴크스바겐그룹(아우디·포르셰 포함), 메르세데스-벤츠 정도임을 감안하면 빠른 편이다. 아이오닉5는 ‘2021 영국 올해의 차’에 선정될 만큼 초기 평가도 좋다.

하지만 ‘엔진’이라는 진입 장벽이 사라지는 전기차 시대엔 그 정도만으로 안심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내연기관차보다 부품 수가 30% 적고 조립도 간편한 전기차 시장에는 테슬라·애플·샤오미 등 글로벌 IT 기업들이 대거 진입하고 있다. 중국에선 ‘대륙의 테슬라’로 불리는 니오를 비롯해 샤오펑·리샹 등 많은 기업들이 중국 자본의 지원을 받아 급성장하고 있다.

◇부품 생태계·인력 개편 등 난제 산적

부품사들의 전기차 전환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한국자동차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4500여 개의 자동차 부품사 중 전기차 관련 부품을 만드는 곳은 5%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은 5700개 부품사 중 20%(약 1200개)가 친환경차 부품을 다룬다. 우리는 친환경차 분야에 종사하는 인력이 4만명 수준이지만 미국은 25만명에 달한다. 미국 자동차 생산량(약 1000만대)이 한국(약 400만대)의 2.5배임을 감안해도 한국이 최소 10만명은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통신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소프트웨어 기술은 크게 뒤진다. 테슬라의 핵심 경쟁력으로 평가받는 무선 업데이트 기술은 전기차를 통합 제어하는 시스템과 운영 체제(OS)가 있어야 가능한데, 현대차는 ‘시스템 통합’을 아직 양산차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자동차연구원에 따르면, 미국은 차량용 소프트웨어 인력만 2만3000명에 달하지만, 한국은 1000명 정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