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밤 폭우가 내리는 한 고속도로를 자율주행차가 달린다. 그런데 앞서가던 차 한 대가 갑자기 미끄러지면서 뒤따라 가던 차량 3대와 추돌했다. 자율차는 방향을 크게 틀어 가까스로 갓길 쪽으로 차를 세운다.
실제라면 위험천만한 상황이지만 사실은 괜찮다. 가상현실에서 벌어진 사고였기 때문이다. 구글의 자율주행 기술 자회사 웨이모가 개발해 지난달 초 공개한 가상현실 프로그램 ‘시뮬레이션 시티’ 내에서다.
자율주행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얼마나 다양한 환경을, 얼마나 많이 경험해봤느냐에 따라 성능이 높아진다. 프로그램이 다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스스로 기술을 고도화하는 머신러닝 기술로 개발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메타버스’(온라인 가상현실)가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
◇빗방울에 반사되는 햇살까지 구현
웨이모의 시뮬레이션 시티에선 하루 3200만㎞를 달리면서 4만여 개의 교통 상황을 훈련할 수 있다. 2016년 설립된 웨이모가 지난 5년간 현실에서 시험해 온 누적 주행거리(2000만㎞) 그 이상을 가상현실에선 하루 만에 실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웨이모는 2017년부터 ‘카크래프트’라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활용해왔는데, 최근 시뮬레이션 시티로 업그레이드했다. 하루 시험 가능한 주행거리는 2배 이상, 검증 가능한 교통 상황 시나리오는 10배 이상 늘었다. 구글이 축적해 온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바탕으로 현실과 똑같은 가상 도시가 구현돼 있고, 날씨와 주변환경도 세밀하게 조작할 수 있다.
예컨대 햇빛이 강한 일몰 무렵 여우비가 내리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 빗방울로 햇살이 반사될 때 카메라·레이더·라이다(LiDAR) 같은 센서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댈러스까지 10시간 동안 도심과 고속도로를 넘나들며 달리는 훈련도 가능하다. 웨이모는 “지금까지 가상현실에서 시험한 주행거리는 누적 240억㎞가 넘는다”며 “모든 데이터는 즉시 프로그램에 입력돼 실시간으로 성능이 개선된다”고 밝혔다.
웨이모뿐 아니다. 미 자율주행 기술 스타트업 오로라는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매일 2200만㎞의 시험주행 데이터를 쌓고 있다. 작년 실제 시험주행 거리는 2만㎞가 채 안 되지만 자율주행 기술 강자로 인정받으며 곧 나스닥 증시에 상장한다.
엔비디아는 자율주행 실험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메르세데스-벤츠에 공급해 기술 개발을 돕고 있다. 중국 텐센트도 하루 1000만㎞ 주행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지난 6월 공개했다.
독일 BMW와 국내 부품사 만도는 3D게임을 제작하는 업체들(각각 에픽게임즈, 유니티)과 협업,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제작해 첨단운전보조장치(ADAS)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현대차도 신형 G90에 탑재될 ‘레벨3’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 개발 및 안전성 검증에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있다.
◇시간·비용 아끼지만, 현실 주행시험도 반드시 필요
자율주행 시험용 차량을 만들려면 대당 3억~5억원 정도가 든다. 하지만 가상현실 테스트는 시간과 돈을 획기적으로 아낄 수 있다. 만도 관계자는 “시뮬레이션으로 축적한 데이터가 실제 주행 데이터와 같을 확률은 98% 정도”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시뮬레이션이 현실 주행시험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교통사고는 교통 상황, 차의 성능, 운전자의 집중도, 외부 환경 등 수많은 변수가 복합적으로 얽혀서 발생하는데, 아직 현실의 모든 위험성을 전부 확인·예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없다는 것이다. 현대차 자율주행사업부 권우철 시뮬레이션파트장은 “가상현실 데이터는 결국 가상에서 쌓은 것”이라며 “현실에서의 검증이 없으면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상현실 속의 다양한 시나리오를 만드는 데에도, 현실에서 쌓은 데이터가 기반이 된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웨이모가 4만여 건의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실제 달리며 마주했던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