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생산라인 맞아? 내년 말 싱가포르에 들어서는 현대차 글로벌 혁신센터(HMGICS) 내 ‘첨단 미니 공장’의 완공 후 예상 모습. 이곳에는 자동차 공장의 상징인 컨베이어벨트가 없다. 독립된 공간에서 각기 다른 차종이 한 대씩 만들어져, 고객이 주문한 다음 날 출고할 수 있다. /현대차

영국 전기 상용차 스타트업 ‘어라이벌’이 현재 영국과 미국에 짓고 있는 공장에는 자동차 공장의 핵심인 컨베이어벨트가 없다. 대신 가로세로가 각각 20m인 네모난 ‘셀(cell)’들이 격자 무늬로 배치돼 있다. ‘공장 속의 공장’으로 불리는 이 셀에서 로봇들이 모여 차를 한 대씩 조립한다. 셀과 셀 사이의 길에는 각 차종에 맞는 부품을 실어나르는 무인 운반대(AGV·Automated Guided Vehicles)들이 오간다. 컨베이어벨트를 없앤 이유는 ‘다차종 유연 생산’을 위해서다. 어라이벌의 주세페 나포 생산 총괄은 “기존 컨베이어벨트는 한 가지 차종만 생산할 수 있지만, 이 셀들은 무한히 다양한 제품을 고객 수요에 맞게 생산할 수 있다”며 “이것이 바로 미래 자동차 공장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업계가 최근 ‘소품종 대량생산’에 최적화된 컨베이어벨트에서 탈출하기 위한 시동을 걸고 있다. 고객들이 원하는 다양한 차종을 주문 즉시 공급해주는 유연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다. 1913년 헨리 포드가 자동차 공장에 처음 도입해 산업화를 앞당긴 컨베이어벨트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까.

영국 전기 상용차 스타트업 어라이벌이 영국과 미국에 짓고 있는 마이크로팩토리는 하나의 '셀'에서 한 대의 차가 만들어진다.

◇벤츠·포르셰·아우디·현대차도 도입

컨베이어벨트에서 탈출하기 위한 시도는 앞서 독일 자동차 업계에서 먼저 시작됐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작년 9월 독일 진델핑겐에 ‘팩토리56’이라는 첨단 공장을 열었다. 벤츠는 이곳에 컨베이어벨트는 최소한만 남기고, 대부분의 조립 작업에 ‘무인 운송 시스템’을 도입했다. 바닥에는 차를 한 대씩 옮기는 대형 무인 운반차와 부품을 실어 나르는 소형 운반대까지 약 400개의 AGV가 돌아다닌다. 컨베이어벨트는 작업 노선이 고정돼 있지만, 이 무인 운반차는 필요하면 경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관계자는 “금요일까지 S클래스를 만들다가 월요일에 E클래스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이곳에선 S클래스, 전기차 EQS, 마이바흐 S가 생산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가 작년 9월 문을 연 팩토리56에 있는 '테크라인'. 컨베이어벨트 대신, 대형 무인 운반차가 차를 이동시킨다.

지난 2019년 포르셰도 순수 전기차 타이칸을 만들기 위해 비슷한 방식의 공장을 만들었다. 무인 운반차가 차를 한 대씩 옮긴다. 포르셰는 거대한 컨베이어벨트 설비 비용을 아껴 공장 구축 비용을 30~40% 줄였고, 생산 물량은 기존 대비 10~20% 늘렸다. 아우디 역시 2017년 비슷한 방식을 도입해 일부 고성능차를 조립하고 있다.

현대차는 싱가포르에 짓고 있는 혁신센터에 미니 혁신 공장을 짓는 ‘H매직’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다. 공장이 완공되면 이곳 역시 컨베이어벨트는 없고 독립된 네모 공간들에서 아이오닉5와 전기 셔틀 등 각자 다른 차종이 만들어진다. 현대차가 공개한 소개 영상에는 고객이 차를 주문한 다음 날 아침에 받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만큼 고객 수요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미다.

◇재고 쌓는 ‘계획생산’⇒재고 없는 ‘주문 생산’

자동차 업계가 컨베이어벨트를 없애는 공정 혁신을 단행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수익성’이다. ‘주문 즉시 생산’이 가능한 체제를 갖추면 재고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현재 주요 자동차업체들은 연간 수요를 예측한 뒤 월 생산량을 정하는 ‘계획 생산’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예측이 잘못되면 수요가 몰리면서 고객 대기가 길어질 수 있고, 반대로 인기가 없으면 재고가 쌓이게 된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컨베이어벨트를 없애고 유연 생산 전체로 전환을 서두르는 것이다. 박정수 성균관대 스마트팩토리융합학과 교수는 “과거 다품종 소량생산은 작업자의 손이 많이 가는 고비용 시스템이었지만, 이제는 로봇과 AI(인공지능) 등 기술 발달로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 전기 상용차 스타트업 어라이벌이 영국과 미국에 짓고 있는 마이크로팩토리의 개념도. 각각의 '셀'에서 다양한 차종이 동시 생산된다.

이 같은 유연 생산이 가능해진 건 ‘전기차 전환’과 ‘모듈화’ 덕분이다. 전기차는 부품 수가 내연기관차 대비 37% 적다. 또 제조 과정에서 각종 부품들을 큰 덩어리로 뭉치는 모듈화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부품수가 적으면 서플라이 체인(공급망)을 관리하기 쉬워지고, 부품의 유연한 공급도 가능해진다. 이항구 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결국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처럼 자동차도 ‘대량 맞춤형 생산’(Mass Customization)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