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울산 중구의 한 주택가에서 박순덕 할머니가 보행기를 이용해 이동하고 있는 모습. 그는 가정환경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이 없도록 2021년부터 올해까지 약 2억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김동환 기자

키 164㎝, 몸무게 36㎏.

지난 8일 울산 중구의 한 다가구 주택 1층 단칸방에서 만난 박순덕(89) 할머니는 이처럼 깡마른 모습이었다. 현재 기초생계급여를 받으며 월세 20만원짜리 사글셋방에 혼자 산다. 기자가 찾아가자 할머니는 침대 옆에 수직으로 세워진 봉을 잡고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앉았다. 인터뷰 도중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이 거북목과 머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계속 기울어지자, 1~2분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박 할머니는 2021년부터 올해까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열매)를 통해 고향인 전북 정읍 칠보면에 1억9650만원의 장학금을 기부했다. 이곳 초·중·고 학생 254명이 그의 장학금을 받았다. 박 할머니는 2년 전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기부 이유를 묻자 그는 “죽기 전에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연필 한 자루라도 더 사주고 싶었다”고 했다.

박 할머니는 정읍 칠보면에서 육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농사일을 하고 집안을 돌보느라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는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길에서 주운 연필 동강이와 찢어진 문종이를 가지고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한글을 배웠다”며 “연필이 없을 땐 아궁이 앞에서 부지깽이로 바닥에 ‘ㄱ’ ‘ㄴ’을 쓰면서 공부했다”고 했다.

그가 18세 되던 해 중매가 들어왔다. “몸이 약한 남자지만, 집에 여유가 조금 있다”는 말에, 박 할머니는 당시 “중학교까지 공부만 시켜준다면 시집을 가겠다”고 승낙했다. 경남 창녕에서 신접살림을 차렸지만 남편의 지병이 심해져 곁에서 돌봐야 했다. 자녀도 삼 남매를 낳았다. 결국 공부를 포기하고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다. 1970년대 초 식구들과 함께 울산으로 건너와 헌옷 장사를 했다. 당시 고물상의 헌옷을 떼어 세탁·수선을 한 뒤 시장에 내다팔았다. 그는 “20리(7.8㎞) 넘는 (울산) 방어진까지 가서 뗀 헌옷들을 머리에 이고, 또 한 손엔 들고 집까지 걸어온 날이 많았다”고 했다. 수십 년 동안 이 일을 하면서 그의 목은 거북목이 됐고, 허리 디스크가 여러 번 터져 수술도 받았다. 한겨울에도 집 옥상에서 헌옷들을 발로 밟아 빨아서 발가락에 동상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이 일을 해서 삼 남매를 대학까지 보내고 장남 집도 사줬다”고 했다.

10년 전 돌보던 남편이 별세하자 기부를 결심하게 됐다. 그쯤부터 깡통을 모아 고물상에 팔아 하루 4만~5만원을 벌었다. 요양보호사인 김영숙(79)씨는 “(박 할머니는) 장갑 살 돈 아낀다고 맨손으로 깡통을 만지다가 양팔이 벌겋게 부어오르는 피부병도 얻었다”고 했다.

그동안 장사해서 번 돈에다 깡통 판 돈까지 보태 지난 2021년 고향에 첫 번째 장학금 6000만원을 전달했다. 그는 “장학금 수여식 때 휠체어 탄 아빠와 함께 온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내 손을 잡더니 ‘할머니 고마워요’라고 한참 울더라”며 “못 배운 제 평생의 한이 녹는 것 같았다”고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매년 찾아가 모두 2억원에 가까운 돈을 기부했다. 내년 봄에는 ‘마지막 장학금’을 전달할 계획이다. 박 할머니는 “모은 돈이 거의 다 떨어졌다. 아직 내 마음의 반도 돕지 못했는데 10년만 젊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올 8월부터 목·허리·무릎 통증이 심해져 거동조차 힘든 상태다. 이틀에 한 번씩 보행기에 의지해 요양보호사와 함께 인근 병원으로 전신 재활을 받으러 가는 것이 그의 유일한 외출이다. 요양보호사 김씨는 “아직도 병원 오가는 길에 깡통이 보이면 (박 할머니는) 보행기에 싣는다”고 했다.

☞아너 소사이어티

사랑의열매가 2007년 만든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들 모임. 최초 2000만원 이상을 기부하고, 5년 내 1억원 이상 기부를 약정한다. 올 11월 말 기준으로 가입자가 3774명이다.

▲공동기획: 조선일보사·사랑의열매

▲문의: 080-890-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