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팅하우스와의 막판 협상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막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협상이라는 게 임진왜란과 같아요. 외부가 아닌 내부의 갈등은 어쩌면 당연한 건데…. 어떻게든 협상이 끝났잖아요. 이제는 다시 병자호란이에요. ‘원자력 을사오적이 어쩌고 저쩌고…’, 아이고…. 돌아보니 (한미)FTA를 체결할 때도 비슷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황주호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 사장은 《월간조선》 8월호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당시 한수원과 원전 설계 업체인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 Electric Company·WEC)와의 ‘비밀 협정’이 공개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황 사장의 발언은 지난 1월 WEC와 가진 지적재산권(IP) 협상 과정의 개인적 소회로만 이해됐다. 하지만 이 발언은 최근 논란이 된 한수원·한국전력(한전)·WEC가 맺은 ‘글로벌 합의 협정(Global Settlement Agreement)’, 이른바 ‘비밀 협정’과 연관된다.
2022년 10월 웨스팅하우스는 한전·한수원을 상대로 지적재산권 침해 소송을 미 법원에 제기했다. 한국이 해외에 수출하는 최신 한국형 원전 APR1400이 자사 원천 기술에 기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작년 7월 체코 정부는 한수원을 체코 두코바니 원전 5·6호기 건설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같은 해 8월 웨스팅하우스는 체코 정부의 한수원 선정에 항의서를 제출했다.
작년 11월 한전·한수원은 비공개 이사회를 열고 웨스팅하우스와의 ‘비밀 협정’ 합의안에 가결했다. 지난 1월 16일 한수원·한전과 WEC가 비밀 협정을 맺자 WEC는 한수원의 체코 원전 수출에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3자 합의에 미 에너지부(DOE)는 환영 입장을 냈다. 체코 정부는 한수원과의 계약을 미루다 지난 6월 4일(현지시각) 180억 달러(약 24조6000억원) 규모의 사업 계약을 최종 체결했다.
원전 1기당 WEC에 1조원 지불
두 달 후인 지난 8월 18일 《서울경제신문》은 한수원이 WEC와 올해 1월 체결한 ‘비밀 협정’을 보도했다. 한전과 한수원, 산업통상자원부는 그동안 비밀 유지 조건을 이유로 구체적인 계약 조건을 공개하지 않았다. 보도에 따르면 한수원은 원전 1기 수출 시 WEC에 기술사용료(지적재산권) 명목으로 1억7500만 달러(약 2400억원), 물품·용역 구매 계약 대금으로 6억5000만 달러(약 9000억원)를 지불해야 한다. 체코 원전 사업비는 1기당 약 13조원이므로 원전 1기마다 약 10%를 WEC에 지불하는 셈이다.
협정 유효 기간은 50년이다. WEC가 동의하지 않으면 계약은 영구 유지된다. 이 때문에 ‘노예 계약’이라는 표현이 붙었다.
한국이 ‘소형모듈원자로(SMR)’를 포함한 차세대 원전을 독자 수출하려면 WEC가 실시하는 기술 자립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이는 기술 주권 침해라는 비판이 있다. WEC 판단에 따라 한국 원전 수출이 불가능할 수 있다.
원전 시장도 한수원과 WEC가 양분하기로 합의했다. 미주, 유럽 등 시장 진출이 용이한 곳은 WEC가 맡는다. 한수원은 중국, 러시아와 경쟁해야 하는 남미·중동·아프리카 등을 담당한다.
비밀 협정 일부 내용이 공개되자 여당에서 ‘불공정 계약’ ‘매국 협정’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지난 8월 1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 12·3 내란을 앞두고 홍보 실적이 다급했던 윤석열 정부가 원자력 기술 주권을 내팽개치고 막무가내식 매국 행위를 했다”며 “윤석열 정부가 ‘괴담’으로 매도한 체코 원전 수출 의혹을 확인하기 위해 국정 조사와 감사원 감사 청구 등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진상 조사를 지시했고 친원전 성향의 원전 전문가들도 이번 협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수출 원전, ‘100% 우리 기술’이라 주장한 바 없다”
지난 8월 19일 한수원 황주호 사장이 국회에 출석했다. 조국혁신당 서왕진 의원이 ‘체코 원전 수주 계약을 급하게 완성하기 위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졸속 불공정 협약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묻자 황주호 사장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서도 “그 수준을 감내하고도 이익이다”고 했다.
이어 황 사장은 한국형 원전에 대해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 상반되는 사실도 밝혔다. 서 의원은 “(한수원은) 언론과 국회 상임위에서 ‘기술 자립을 100% 완료했기 때문에 원전 수출에 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번 협약 결과를 보면 라이선스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 결국 원천 기술은 웨스팅하우스에 있는 것으로, 원전 수출에 있어 한수원이 주장한 기술 자립이 실효성 없음을 인정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에 황 사장은 이렇게 답했다.
“애초부터 (체코 수출 원전이) ‘100% 우리 기술’이라고 주장한 바는 없다. 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원자력계 일부에서 오해를 살 만한 홍보가 있었다면 잘못이다. 일부에서 100% 국산 기술로 확보한 것처럼 착각할 수 있는 발언이 있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는 분쟁 소지가 있는 구조였다. 오해를 유발했다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한수원이 한국형 원전의 원천 기술을 갖고 있지 않음을 공식 인정한 순간이었다.
황주호 사장은 ‘체코 원전 수주 초기 설정한 사업 내용과 웨스팅하우스와의 협정 체결 이후 변경된 내용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의에 “총액과 퍼센트로 나눠봤을 때 웨스팅하우스에 큰 몫(포션)이 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웨스팅하우스는 공급망이 없다. 공급망 없는 쪽이 몫을 가져가도 결국 공급망 있는 쪽으로 의뢰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이는 WEC에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향후 원전 수출에서 한수원의 공급망이 상대적으로 우수해 한국이 손해 보는 입장은 아니라는 취지다.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기자재 제작이나 원전 시공을 맡을 한국 기업은 손해를 보지 않더라도 한수원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APR1400의 계보
논란이 된 ‘비밀 협정’을 두고 일각에서는 ‘한국이 한국형 원전에 대한 원천 기술이 없어 벌어진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간 한수원과 원전 산업계는 대외적으로 ‘국산화’ ‘기술 자립’을 강조했다. 해외 원전 시장을 확보만 하면 얼마든지 수출할 수 있는 양 홍보했다. ‘설계·시공·운영 능력을 모두 보유한 국가’라며 독자 기술이 있는 것처럼 포장해 왔다. WEC가 한수원을 상대로 지적재산권을 문제 삼으면 언론에는 ‘오래전에 끝난 일, 문제 될 것 없다’는 식으로 대처했다.
최근 한국 주력 원전인 APR1400의 기술 계보가 미국 기업 기술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담은 자료가 공개됐다. ‘APR1400 설계 인증 취득 관련 문서(Licensing support and consulting service for APR1400 design certification application to the US nrc)’다. 《시사IN》이 민주당 김한규 의원실에서 입수해 보도했다.
한수원·한전·WEC 등이 참여해 2012년 8월 27일 작성한 이 문서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에 APR1400 설계 인증을 받기 위해 만들어졌다. APR1400은 한국이 UAE에 수출한 바라카 원전의 원자로다. NRC는 원자력 분야 안전 규제 총괄 기관이다. 한국의 원자력안전위원회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NRC 설계 인증 취득 목적은 미국 원자력발전 시장 진출과 세계 시장 수출 경쟁력 강화였다. NRC 인증은 미국 내 원전 건설·운영의 필수 조건이다.
한수원은 2014년 12월 NRC 인증을 신청해 2019년 8월 표준설계인증(Standard Design Certification)을 획득했다(ADAMS Accession No. ML15006A098). NRC의 표준설계인증은 정해진 기준에 따라 진행된다. 인증 획득은 APR1400의 안전성과 기술력을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보증수표’ 역할을 한다. 다른 국가에 원전을 수출할 때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김한규 의원실이 확보한 문서에서 주목할 점은 다음 내용이다.
〈APR1400 설계는 한수원(KHNP)을 비롯한 한국 기관들이 개발한 가압수형 원전 설계를 의미하며, 출력은 약 1400MWe이며, 웨스팅하우스가 소유한 System 80+ 기술을 기반으로 하거나 이를 포함하고 있다(APR1400 design means a pressurized water reactor nuclear power plant design developed by KHNP, along with other Korean entities, having a power output of approximately 1400 MWe and which is derived from, based on, and/or incorporates System 80+ technology owned by Westinghouse).〉
여기서 ‘System 80+’ 기술은 웨스팅하우스가 소유한 원천 설계 기술을 말한다. 한국형 원전 APR1400의 설계가 WEC 기술에 기반했음을 한수원이 인정하는 문건이다.
턴키로 시작한 한국 원전
한국 원전은 기술, 자본, 인력 부재 상황에서 1971년 출발했다. 당시 한국은 원전을 독자 설계하거나 건설할 능력이 없었다. 첫 원전 사업은 모든 과정을 해외 업체에 일괄적으로 맡기는 턴키(Turn-Key) 방식으로 진행했다. 턴키는 ‘열쇠(Key)를 돌리면(Turn)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인도한다는 의미다. 설계·시공 일괄 입찰이라고도 한다.
이때 한국은 미국 웨스팅하우스사와 계약을 맺고 한국 최초 상업용 원전인 고리 1호기를 도입했다. 1971년 11월 착공해 1978년 4월 상업 운전을 시작했다. 웨스팅하우스가 원자로 포함 핵심 설비 공급과 전체 사업 관리를 책임졌다. 터빈 등 2차 계통은 영국 GEC가 담당했다. 현대건설, 동아건설 등 국내 기업은 하도급 형태로 시공 일부에 참여하는 수준에 그쳤다.
1980년대 중반 정부와 한전(한수원은 2001년 분리)은 원전 시공 수준에서 벗어나 원전 관련 전반적인 기술 자립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한국에 원전 설계 핵심 기술을 이전할 업체가 필요했다.
정부는 WEC와 미국 원전 기업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ombustion Engineering·CE)을 경쟁시켰다. 당시 웨스팅하우스는 기술 이전에 소극적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세계 원전 산업이 침체기에 접어들자, 새로운 활로를 찾던 CE는 한국에 원자로 설계, 제작, 관리 등 모든 핵심 기술 이전을 제안했다. 한국 기술진 교육, 공동 설계 참여 방식도 포함했다. 이때 CE가 제공한 원전 설계 기술이 ‘System 80’이다.
System 80+와 APR1400
CE는 System 80을 발전시켜 1980년대 ‘System 80+’라는 가압경수로(PWR) 원전 설계 모델을 개발했다. 한국은 이를 바탕으로 APR1400을 설계·개발했다.
1997년 System 80+는 NRC에서 표준설계인증을 받았다. 한수원은 APR1400의 NRC 인증 신청 시 System 80+를 언급했다. System 80+ 설계가 이미 NRC 인증을 획득했으므로, APR1400의 기술적 계보를 드러내면 NRC 심사가 용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NRC 인증을 쉽게 받으려던 2014년의 전략이 10년 뒤 ‘비밀 협정’ 과정에서 한수원에 불리한 근거로 작용했다.
NRC 인증을 통해 APR1400의 안전성과 품질을 세계에 입증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APR1400의 계보를 System 80+라고 ‘문서화’해 기술 주권에 대한 법적 주장을 약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국제적 정당성 확보 노력이 역설적으로 기술적 종속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됐다.
CE는 한국 원전계의 과외 교사 같은 존재였다. 한전은 1980년대 후반 CE로부터 ‘System 80’ 설계를 도입해 원전 기술 자립 기반을 마련했다. System 80 설계를 바탕으로 한국 표준형 원전인 ‘OPR-1000(1000MWe급)’을 1995년 개발했다. OPR-1000은 한울(경북 울진) 원전 3~6호기, 한빛(전남 영광) 원전 3~6호기, 새울(울산 울주) 1~2호기, 신월성(경북 경주) 1~2호기 등 총 12기다.
한국은 한국형 표준 원전 OPR1000 을 12기 건설하며 원전 기술을 확보했다. 이후 후속 모델인 APR1400을 개발하며 더 발전한 설계인 System 80+를 CE에서 도입했다. APR1400 개발은 1992년 정부 국가선도기술개발사업의 일환인 ‘차세대 원자로 기술 개발 사업’으로 출발했다. 10년간 연구비 2340억원, 연인원 2300명이 투입됐다.
이 결과 3세대 원자로인 APR1400이 2001년 탄생했다. APR1400은 기존 OPR-1000 대비 출력이 40% 증가했다. 내진 성능은 0.2g(규모 6.5)에서 0.3g(규모 7)로 향상됐고 설계 수명은 40년에서 60년으로 늘었다. 이러한 성과 덕분에 한국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 4기를 수출했다.
OPR1000은 System 80, APR1400은 System 80+에 설계 기반이 있다. System 80과 System 80+는 CE사가 개발한 기술인데 왜 웨스팅하우스가 지적재산권을 요구하는 것일까.
웨스팅하우스, 2000년 CE 인수
2000년 웨스팅하우스가 CE의 원자력 사업 부문을 인수하면서 CE가 보유한 모든 권리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이에 CE가 한국에 제공한 원전 설계 원천 기술도 웨스팅하우스의 재산이 됐다.
한국은 2009년 UAE 바라카 원전 수출 당시 핵심 기술을 국산화하지 못했다. ▲심장에 해당하는 원자로냉각재펌프(RCP) ▲두뇌에 해당하는 원전계측제어시스템(MMIS) ▲신경망에 해당하는 핵심 설계 코드 등 핵심 기술은 해외 업체(WEC 등)에서 들여와야 했다.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는 원전 수주를 놓고 경쟁하면서도 협력하는 관계였다.
한수원은 2006년 원전 3대 핵심 부품 개발을 시작해 2010년 MMIS, 2012년 RCP, 2017년 설계 핵심 코드를 차례로 국산화했다. 문제는 ‘국산화’를 했지만 설계 핵심 코드는 CE가 개발한 프로그램에 기반해 여전히 웨스팅하우스의 원천 기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국산화된 설계 코드는 애초 CE사 코드(원천 기술)를 분석, 역설계해 개발했기에 기본 구조와 알고리즘은 원천 기술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원전 기술을 국산화했지만 이게 ‘원천 기술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정범진 교수는 “한국 원전은 ‘기술 자립’에는 성공했으나 ‘기술 독립’은 이루지 못했다”면서도 “우리나라가 미국을 위협할 만한 수출상품을 가졌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했다.
2022년 10월 미국 웨스팅하우스사는 컬럼비아 연방지방법원에 한전 등 우리 원자력 업체를 상대로 지식재산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를 두고 당시 이종호 전 한국수력원자력 기술본부장은 “APR1400 설계의 모든 지식재산권은 국내 업체가 소유하고 있다. APR1400 개발에 웨스팅하우스의 ‘System 80+’ 기술을 참고했으나, APR1400의 모든 설계나 기술은 국내 업체가 개발하고 생산했다”며 “APR1400 관련 모든 기술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 본부장은 “(당시) 아무리 우리가 기술을 개발하여도 APR1400 기술 개발에 참고한 웨스팅하우스 기술의 저작권(System 80+)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우리가 기술자립을 해도 WEC의 System 80+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고 그 문서가 바로 기술사용협정(License Agreement; LA)이다. 자체 개발한 원전 기술에 웨스팅하우스 저작권이 일부 포함되더라도 사용에 제약이 없도록 웨스팅하우스에 별도 대가를 지급하고 협정(LA)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 전 본부장은 원전 기술의 완전한 자립(독자적으로 설계, 제작 등 운용할 능력을 확보)과 법적인 기술 독립은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설계·제작 기술이 세계 최고이나 모든 기술이 삼성전자 소유의 기술이 아니어서 필요할 경우 기술료를 지급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한국 원전도 핵심기술을 자립하고 모든 능력을 갖고 있지만 WEC의 System 80+ 기술을 참고하거나 사용함에 따라 법적인 제한이 있다. 이에 1997년 협정에서 별도 보상으로 WEC의 원천 기술을 영구적 사용권을 확보해 수출을 자유롭게 하고자 했다. 다만 미국 정부의 요구로 미국의 수출 통제는 준수하기로 합의했다.”
“1997년 400억원 주고 WEC와 협상 마쳐”
이 전 본부장은 지난 8월 23일 《시사저널》 기고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기술사용협정(LA)의 내용을 요약하면, 협정 기간(1997~2007년)에 WEC 기술 사용은 물론 협정 종료 이후에도 WEC 원천 기술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기술료로 보상했다. 만약 핵심 기술을 한국 측이 확보하지 못하면 별도로 보상하기로 하고, 수출 통제 준수를 조건으로 약 400억원 정도의 보상으로 협약을 체결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수원은 WEC에 400억원을 지불해 APR1400 수출 시 WEC 원천 기술 사용권에 대한 문제를 없앴다. 한국이 핵심 기술 자립을 못 하면 관련 기술은 한수원이 WEC에서 도입하되 별도로 보상한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한수원이 UAE에 바라카 원전을 수출할 때, 당시 국산화하지 못한 핵심 기술은 WEC 등을 통해 해결했다.
그러나 지난 1월 맺은 ‘비밀 협정’은 1997년 체결한 기술사용협정을 무력화(無力化)한다. 웨스팅하우스의 행보를 두고 ‘WEC가 한수원을 견제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UAE 바라카 원전 수출 당시에는 웨스팅하우스나 미국이 문제 삼지 않다가 왜 체코 원전 수주는 문제 삼는 걸까.
이를 두고 정범진 교수는 “체코 원전 수출은 체코가 한수원에 원전 수출뿐 아니라 원전 설계 기술까지 요구하고 있는데 이 기술의 원천을 WEC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기술 자립은 라이선스를 받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상태다. 기술 독립은 라이선스 없이 만들어 수출까지 할 수 있다. 우리는 원전에 대한 기술 자립을 했을 뿐이다. 1997년 기술사용협정 당시 WEC가 한수원에 부여한 권리는 원전 제품을 미국 외 지역에 건설, 판매할 권리다. 그 근간이 되는 기술 자체를 제삼자에게 전수할 권리는 포함하지 않았다. UAE는 ‘완성된 원전’ 제품만 필요로 했다. 이 거래는 1997년 맺은 협정을 준수했기에 웨스팅하우스가 문제 삼을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체코 사례는 다르다. 원전 운영 경험이 있는 체코는 한수원에 자체적인 유지 보수, 설계 변경 등을 위한 관련 기술 전수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웨스팅하우스와 새로운 협상을 통해 기술 이전에 대한 허락과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고, 이번 협정이 맺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 본부장은 지난 9월 17일자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WEC와 지적재산권 문제의 출발은 2017~8년경 한국 측이 3대 원전 핵심기술을 자립했으니 미국의 수출 통제(수출 허가 획득)를 받지 않고도 사우디아리비아에 원전을 독자적으로 수출하려고 시도하면서 발생했습니다. 미국 원자력법 123조에 따르면 미국산 원천 기술이 들어간 원전을 수출하려면 `원전을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한다`는 협정(123협정)을 미국과 체결한 국가에만 해야 합니다. 사우디와 미국은 123협정을 체결하지 않았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위험 국가에 한국이 원전을 수출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 이후 체코에 원전을 수출할 때도 우리 측은 미국에 ‘한국 독자 기술’이라 계속 주장해 WEC 측이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WEC의 원천 기술을 사용하고 있음과 미국의 수출 통제 의무를 준수하겠다는 기술사용협정(LA) 체계 하에서 협상을 출발했다면 기술 이전 문제도 훨씬 유리한 결과를 얻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통행료 장사’
체코에 수출하는 원전의 원천 설계는 WEC 소유이며, 이를 한국이 제3자에게 제공하므로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미 정부의 허가도 받아야 한다.
정범진 교수는 “기술재산권은 한수원-WEC의 관계이고, 한수원은 미국 에너지부(DOE)와의 관계가 별도로 존재한다. 수출 (허가) 통제다. WEC는 한수원을 대신해 적극적으로 체코 원전 수출에 대한 신고를 DOE에 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에 한국이 DOE에 대신 신고했지만 DOE는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미신고 상태에서 수출이 진행된 것이 문제가 됐다”고 했다.
이어 “수출 국가를 분할한 합의는 설명이 안 된다. 미 DOE가 힘으로 누른 게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원전을 수출할 때마다 재협상을 하는 것보다 일괄 타결이 된 것은 장점”이라고 했다.
웨스팅하우스가 한수원의 원전 수출에 제동을 거는 이유는 한국을 세계 원전 시장의 경쟁자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WEC가 가진 무기는 두 가지다. 첫째는 System 80+ 설계에 대한 원천 기술이다. 둘째는 미 정부에 원전 수출을 신고하는 ‘신고 의무자’라는 점이다.
웨스팅하우스가 미국 에너지부(DOE)에 핵 기술 수출을 신고해야 하는 의무는 미국 ‘원자력법(Atomic Energy Act of 1954)’과 시행 규정인 ‘10 CFR Part 810(해외 원자력 활동 지원)’에 근거한다. 이 법과 규정은 핵 비확산과 국가 안보를 목적으로 미국에서 유래한 원자력 기술의 해외 이전을 통제한다.
미국 원천 기술을 이전받은 외국 기업이 제3국에 관련 기술을 수출할 경우 미국 에너지부(DOE)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미국 원천 기술을 사용하는 외국 기업(한수원)은 직접 신고할 수 없고, 원천 기술을 보유한 기업(웨스팅하우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WEC가 지적재산권과 수출 신고 의무를 무기 삼아 ‘통행료 장사’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신고 의무자라는 독점적 지위를 활용해 원전 시장 경쟁자인 한수원에 대해 수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출 통제 준수에 대해서도 이 전 본부장은 다른 관점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1997년 기술사용협정(LA) 체결 당시 우리가 핵심기술을 자립하면 별도 보상으로 WEC의 원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나 수출 통제 준수는 WEC의 원천 기술을 사용하는 한, 기술 독립을 하지 않은 한 영원히 준수해야 할 조건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이 조항으로 WEC가 우리의 수출을 방해할까 우려했고 LA와 관련한 조항에 ‘한국의 원전 수출에 대한 미국 정부 승인을 위해 WEC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문구를 추가로 삽입했습니다. 이도 부족해 2015년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에서도 ‘원자력 협력’이라는 조항을 우리 요구로 신설해 `교역을 제한하기 위해 이용되지 아니한다. 당사자들은 필요한 허가의 신청에 대하여 신속하고 부당한 비용 없이 조치를 취하고 그러한 허가를 신속히 발급하기 위해 모든 합리적인 노력을 다한다’ 문구를 합의해 넣었습니다. ”
이 전 본부장은 “이번 체코 수출에서도 우리가 LA에 따라 (미국 정부의) 수출 허가 승인을 받기 위한 자료를 WEC에 제출했으면, 체코는 미국과 123협정을 체결한 국가이므로 WEC에가 오히려 미국 정부에 수출 허가를 요청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프랑스 사례 참고해야”
박상덕 서울대 원자력정책센터 연구위원은 이번 협정을 이렇게 평가했다.
“원천 기술이 없으면 기술 사용료 일부를 지불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럽 원전 시장에 진출하지 못한다고 합의한 점, 향후 개발할 우리 원전 기술을 WEC 측에 보여줘야 한다는 점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APR1400을 NRC에서 인증받는 과정에서 인허가를 빨리 받으려 System 80+와의 계보를 강조한 게 ‘기술 종속’을 스스로 드러내 독이 된 것 같습니다. 이번 협정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원전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쉽진 않습니다. 시간과 돈이 있으면야 가능은 하지만 20년쯤 걸릴 겁니다.
프랑스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도 미국에서 원전 기술을 들여왔지만, 협상을 통해 미국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수출을 합니다. 한미원자력 동맹을 맺어 해외 원전 시장에 진출할 때 우리 기업의 리스크 관리 방안을 잘 판단해야 합니다. 설계(웨스팅하우스)보다 현장 시공(건설)이 짊어지는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뒤바꾸는 게 쉽진 않겠지만 계속 목소리를 내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