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진짜 사장 나와라.”
지난 8월 25일 현대제철 협력사 비정규직 노조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원청인 현대제철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날 노란봉투법(노동법 2·3조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마자 하청업체 노조가 원청인 대기업에 ‘직접고용’을 요구한 것이다. 비정규직 노조는 “진짜 사장 현대제철은 비정규직과 교섭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현대제철이 아닌 하청업체와 근로계약을 맺고 현대제철에 근무하는 근로자다. 노란봉투법 이전까지 교섭대상은 하청업체였으나 국무회의와 6개월 유예기간을 거쳐 법이 시행되면 이들도 원청인 현대제철과 직접 교섭을 요구할 수 있다. 8월 27일에는 검찰에 현대제철이 부당 노동행위를 했다며 고소장을 제출했다.
장면 2 최근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을 찾으면 ‘공장 임대’라는 붉은색 현수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기업이 떠나면 중소기업도 어려워진다. 이곳에서 “전기요금이 감당이 안 된다” “노조와 갈등이 감당이 안 된다” “사고가 나면 대표가 다 책임져야 한다”는 불만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과거 활기를 띠었던 반월산업단지 등 국내 제조단지에서는 최근 2년간 표면처리업종의 폐업률이 30% 이상 급증했다. 대기업 하청이 많은 특성상 대기업이 해외로 나가게 되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미 현장에서는 피부로 이를 느끼고 있는 것.
수도권과 지방 공단 곳곳에서는 주차장의 절반이 비어있는 공장들이 늘어나고, ‘공장 임대’ 전단이 곳곳에 붙어 있으며, 주요 설비가 멈춘 채 적막한 모습을 보이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위기 뒤에는 한국 제조업의 약화된 비용 경쟁력이 자리 잡고 있다.
끝없는 기업 옥죄기… “차라리 떠나자”
전국 산업단지에 ‘공장 임대’ 안내문이 나붙고, 기계 소리가 끊긴 빈 공장이 늘어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철강 등 미래산업의 주역들이 초대형 인센티브를 내세운 미국으로 대거 향하고 있다. 이젠 대기업 일자리도 안심할 수 없다.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살길을 찾고 있다.
하지만 기업은 한국을 떠나는 것을 고민한다. “경영권 분쟁 및 소송 리스크가 증가한다”며 한국경제인협회·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8단체가 모두 반대했는데도 노란봉투법이 통과하자 기업들이 느끼는 불안은 크다. 자칫 탈한국을 부채질할 수 있는 상황이다.
2020년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은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특정 국가나 지역에 생산이 집중된 탓에 물류 대란과 핵심 부품 수급난이 발생했고, 이는 곧 전 세계 경제 시스템을 뒤흔드는 위기로 이어졌다. 각국은 이 교훈을 토대로 자국의 핵심 산업 생산 기반을 다시 자국 내로 불러들이는 ‘제조업 귀환(리쇼어링)’ 정책을 경쟁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선두 주자가 미국이다. 미국은 ‘리쇼어링’과 더불어 ‘프렌드쇼어링(우방국 중심 공급망 재편)’을 핵심 전략으로 내세웠다. 세계의 공장을 미국으로 다시 가져오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중국의 생산 독점 체제를 견제하고, 자국 중심의 안정적인 공급망을 재구축하며, 기술 패권을 영속화하겠다는 국가 전략의 일환이다.
미국에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데, 한국은 반기업 정책이 늘어나는 상황이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이재명 정부 들어 법인세 인상, 상법 개정, 노란봉투법 등 기업을 옥죄는 정책들이 추진되면서 기업들은 심리적 압박을 크게 느끼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이 관세를 부과하고 규제를 강화하는 상황 속, 국내에서도 불확실성이 커지자 차라리 미국에 투자하는 것이 낫겠다는 심리가 확산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은 2022년부터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CHIPS Act·칩스법)이라는 두 개의 거대 법안을 통과시켜, 전례 없는 규모의 재정 지원과 직접 보조금, 대규모 세액 공제, 파격적인 주정부 인센티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 정책들은 단순한 경제적 논리를 넘어 세계 생산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제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25%, 수출의 80%를 차지하며 경제의 핵심축을 담당하는 한국은 이 거대한 변화의 파도에 취약하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와 국가 우선주의 정책은 한국 기업들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기회를 주는 동시에, 국내 생산 기반을 약화시키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과거의 ‘세계화’ 시대와는 전혀 다른 게임의 규칙이 시작된 것이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낮은 생산 원가와 노동력, 그리고 통상 마찰을 피하기 위해 해외로 진출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이 제공하는 막대한 보조금과 거대한 내수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주요한 유인책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미국 현지 생산을 ‘선택’이 아닌 ‘필수’로 받아들이는 배경이 되고 있다.
김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 외에도, 미국이 기업에 제공하는 매력적 혜택에 기대가 큰 것”이라며, “특히 전기요금, 세제 혜택, 신속한 인허가 등 여러 면에서 미국이 한국보다 훨씬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 시장 자체가 워낙 매력적이고 발전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미국의 관세 정책이 단기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기업의 판단이 대규모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항구 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트럼프의 고관세 정책은 이미 한국 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가속화하고 있다”며 “현대차는 트럼프의 고관세 부과 전에 50만대 생산능력의 최첨단 메타 플랜트를 짓기 시작했는데, 고관세로 인해 추가적인 투자가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는 15% 수준의 세제 지원, 일부 현금 보조 확대 등 응급조치를 내놓았지만, 미국식의 초대형 현금 보조, 인프라 패키지, 주 정부의 맞춤형 지원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상상 초월 늘어난 대미(對美) 투자
2022년 이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에너지솔루션, SK온, 포스코 등 주요 기업들은 잇따라 미국 내 대규모 투자를 발표했다. 투자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근본 이유는 미국 정부, 주정부의 지원이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250억달러(약 23조~34조원)를 투자해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며, 2000명 이상의 고용을 창출할 예정이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3월 조지아주 브라이언카운티에 전기차·배터리 공장(메타플랜트)을 건설했다. 총 80억달러(약 11조원)를 투자, 8100명을 직접 고용할 계획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GM, 혼다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과 손잡고 미국 미시간, 오하이오, 테네시 등에 100억달러(약 13조5000억원) 이상을 투자하여 1만명 이상의 일자리를 만든다.
SK온은 포드와 합작해 테네시·켄터키에 총 11조원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포스코퓨처엠은 캐나다와 미국에 배터리 소재 공장을 건설하며 6억 캐나다달러(약 5500억원)를 투자했다. 이러한 대규모 투자는 미국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인센티브에 직접적으로 연동되어 있다. 한 예로 현대차는 조지아주로부터 약 2조4000억원의 현금과 세금 감면 패키지를 받았으며, 삼성전자는 칩스법에 따라 47억5000만달러의 연방 보조금과 막대한 세액 공제를 기대하고 있다. 나아가 부지 무상 제공, 25~30년간 재산세 감면, 신속한 원스톱 인허가 등 주정부 차원의 파격적 지원은 기업들에 단순한 혜택이 아닌 ‘생존 전략’이 되었다.
여기에 비해 국내에서 기업 하는 환경은 열악하다. 전기요금만 봐도 그렇다. 2025년 7월 기준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kWh당 182.7원으로 최근 3년간 73% 상승했다. 반면 미국 평균은 121.5원이며 루이지애나 같은 일부 주에서는 50원대에 불과하다. 이는 생산 비용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전기료에서 상당한 격차를 만들어낸다. 정부 보조금도 미국은 IRA법과 칩스법을 통해 개별 투자에 수조원대의 현금과 세제 혜택을 지원하지만, 한국은 세액 공제율이 15% 수준에 그치고, 직접 현금 보조금은 1조원 미만으로 규모 면에서 현저히 뒤처진다. 인허가 절차는 한국은 환경 심사 등으로 평균 6개월에서 2년까지 소요되는 반면, 미국은 주정부 전담팀을 구성해 3~12개월 내에 신속히 처리하고 부지 제공 등 행정 절차를 대폭 단축한다.
경직된 노동시장도 기업들이 국내 투자를 꺼리게 하는 요인이다. 이항구 연구위원은 “한국에서 최첨단 무인 공장을 짓기 어려운 주요 원인은 노조 문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최근 현대차를 비롯한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고용 인원을 대폭 축소한 디지털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데 국내 투자를 촉진하고 원가 경쟁력을 제고해 수출과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도 이러한 추세에 적극 동참할 필요가 있다”며 “최근의 노사 환경 변화가 국내 기업들의 국내 신규투자를 저해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염명배 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역시 국내 기업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노동시장의 문제”를 꼽으며, “AI와 로봇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가 왔지만, 한국은 해고가 쉽지 않은 구조다. 이는 기업들이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다. 또한 “노조의 허락을 받아야 공장을 닫거나 해외로 나갈 수 있도록 법이 강화되고 있는 점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미국, 기회만 아닌 ‘양날의 검’
그렇다고 미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것이 마냥 장밋빛 미래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투자는 기회인 동시에 예상치 못한 비용과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노동력 부족과 임금 상승이다. 이미 TSMC의 애리조나 공장은 인력 부족으로 가동이 1년 지연됐고, LG와 GM의 합작 공장은 노조 설립 후 임금이 25~30% 인상되는 상황을 겪었다. 건설 비용 또한 폭증하고 있는데, 인플레이션과 자잿값 폭등으로 삼성전자의 텍사스 공장 투자액은 당초 170억달러에서 250억달러로 50%나 늘었으며, 인텔의 오하이오 공장도 200억달러에서 300억달러로 두 배가 되었다.
무엇보다 큰 리스크는 정책의 불확실성이다. 정권 교체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며, 이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IRA법 폐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기업들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환경 심사 및 주민소송 등 법적 리스크도 만만치 않아 추가 비용과 지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지화 압력이 거세지고 있지만 부품, 소재, 인력 조달망이 아직 미성숙하다는 점도 위험 요소다. 이는 추가적인 투자와 물류비 증가를 초래할 수 있다. 기업들은 인센티브를 온전히 받기 위해 계약상 의무를 이행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국내 생산 기반의 경쟁력은 더욱 약화할 위험도 있다. 모두 미국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의 해외 이탈은 단순히 공장 몇 개가 문을 닫는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염명배 교수는 “대기업들이 미국으로 빠져나가면서 국내에 있던 본사까지 해외로 이전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는 해외에서 벌어들인 이익이 한국으로 유입되는 경로마저 사라지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시급한 대책으로 ‘기업 친화적 환경’을 만드는 것을 꼽는다. 김태황 교수는 “정부와 기업 모두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기업 입장에서는 각자도생의 길을 택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단기적인 성과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의 투자 심리를 살리고 기업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제도와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염명배 교수는 “세금을 더 걷기 위해 세율을 올리는 것보다, 기업들이 신나게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업 활동이 활발해지면 기업 소득이 늘어나고, 세율을 올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세금이 더 많이 걷힐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치적·이념적 논리가 아닌 경제적 원리에 기반한 정책을 강조했다.
기업 하기 어려운 한국
하지만 한국의 대응은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이 막대한 자금과 행정적 지원으로 ‘공장 잡기’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아직까지도 부분적인 세제 혜택과 제한적인 현금 보조에 머물러 있다. 대안으로 구조 개혁이 요구된다. 우선 국가 전략 기술에 대한 세액 공제율을 20~25%로 확대하고, 직접 보조 제도를 도입하는 등 세제 혜택이 요구된다. 중요한 것은 무차별적인 지원이 아닌, 공급망과 기술, 인재를 고려한 ‘선택과 집중’ 전략이다. 대기업의 글로벌 확장 흐름을 인정하더라도, 국내에 남는 연구개발(R&D) 핵심 기능, 소재·부품 산업의 자립, 지역 클러스터 중심의 산업 재구축, 미래 인재 양성 등 다각적인 정책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