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면ㆍ해평면에 위치한 구미국가산업단지 5공단 ‘하이테크 밸리’전경. photo 구미시청

새해 반도체 업황회복이 가시화되면서 지난 7월 비(非)수도권 유일의 반도체특화단지로 지정된 한국 전자산업의 요람 구미에도 봄바람이 불고 있다. 2022년 12월 정부는 전국 지자체를 대상으로 반도체·2차전지·디스플레이 등 첨단산업 단지를 공모해 지난 7월 모두 7곳을 선정했다. 그중 반도체특화단지로 선정된 곳은 경기도 용인시·평택시, 경북 구미시 등 3개 지역이다. 비수도권으로는 구미가 유일한데, 구미시에 따르면 7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것이라고 한다.

반도체특화단지로 지정되면 2022년 특별법으로 제정된 ‘국가첨단전략산업법’에 따라 필수 인프라 구축, 산업 육성, 인허가 처리기간 단축, 금융·인력 등 각 지역별 특성에 맞는 맞춤형 지원이 이뤄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입주해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로 일찌감치 낙점된 용인과 평택이 메모리·시스템 반도체 제조에 특화됐다면, LG이노텍, SK실트론과 삼성SDI 등이 있는 구미는 이를 뒷받침할 반도체 소재와 부품 분야를 맡았다. 일종의 후방기지 역할을 하는 셈이다. 구미시에 따르면, 반도체특화단지 조성으로 기대되는 생산유발효과는 5조3000억여원, 부가가치 유발효과는 2조8000억여원, 취업유발효과 6500여명에 달한다.

한국 반도체 산실이 겪은 침체 과정

반도체특화단지가 들어설 곳은 구미시 산동면·해평면에 걸친 구미국가산단 5단지(5공단) ‘하이테크 밸리’다. 축구장 375개에 달하는 면적 9.4㎢의 5공단은 전자·정보기기, 메카트로닉스, 신소재와 전자장비 제조업 등을 포괄하는 미래형 산업을 유치할 목적으로 지난 2008년 조성한 국가산단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구미형 일자리’ 사업으로 착공했던 LG BCM(LG화학 자회사) 구미공장과 탄소섬유 세계 1위 기업인 일본 도레이그룹 구미공장 등은 이미 입주해 공장을 가동 중이다.

하지만 지난 12월 26일 구미역에서 차로 30분가량 떨어진 구미 5공단 ‘하이테크 밸리’를 찾아갔을 때는 텅 빈 공장부지가 눈에 많이 띄었다. 빈 공장부지에는 ‘산업 1BL(블록)’ ‘산업 6BL’ 등과 같은 새 주인을 찾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구미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낙동강 양안(兩岸) 공단동에서 옥계동 일원에 자리한 1~4공단에 2000곳 가까운 공장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것과는 비교되는 풍경이었다.

구미반도체특화단지 추진단 관계자는 “5단지는 1, 2단계로 나뉘는데 1단계는 이미 입주 완판이 되었고, 2단계 부지가 반도체 신규투자기업이 들어설 곳이다”라고 설명했다.

구미는 한때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렸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9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인 옛 선산군 구미읍(현 구미시)에 공단이 조성되면서 구미는 한국 수출액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는 대표 산업도시로 떠올랐다. 공단 조성 직후에는 곧장 수출 10억달러를 돌파했고, 1976년 수출 100억달러를 돌파한 다음에는 ‘수출도시’를 상징하는 ‘수출탑’이 경부고속도로 구미나들목 인근에 세워졌다. 그 결과 1978년 구미읍은 선산군에서 독립해 어엿한 ‘구미시’로 승격되기에 이른다. 한국 반도체 기술개발의 산실로 불린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전신)가 1976년 설립된 곳도 구미로, 1982년에는 인터넷망(IPv4네트워크)이 전국 최초로 구미에 구축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왼쪽)이 지난 2월 경북 구미 SK실트론을 방문해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실리콘 웨이퍼 생산시설을 시찰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거듭된 국책사업 유치 실패

하지만 화려했던 과거를 가진 구미는 현재 기나긴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전자도시로 태동한 만큼 구미의 제조업은 삼성과 LG 등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 한데 인건비 상승 등으로 대기업의 해외이전이 가속화되고 국내 생산물량을 점차 줄여나가자 나머지 협력업체들이 줄줄이 무너지면서다.

여기에 지방 인재들의 수도권 쏠림현상도 구미의 쇠퇴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한때 전국에서 인구증가율이 가장 높은 도시, 가장 젊은 도시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던 구미는 지난 2015년부터 인구가 줄기 시작해 2022년에는 40만명 선에 겨우 턱걸이했다. 지금은 인구 100만명을 훌쩍 넘긴 용인(107만명)은 물론, 한때 구미보다 인구가 적었던 평택(57만명), 파주(49만명), 김포(48만명) 등지에도 인구에서 이미 추월당한 상태다.

지난 정권 동안 거듭된 각종 국책사업 유치 실패도 구미의 쇠락을 부채질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 선정에서 제외됐고, 지역균형발전 정책에 있어서도 구미국가산단 4단지(4공단) 착공 외에는 별다른 혜택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 LG디스플레이가 신규 공장입지로 구미를 검토하다가 북한과 접경지역인 경기도 파주로 발길을 돌린 것은 결정타였다. 그 결과 충북 청주와 구미에 주력 공장을 두고 있던 옛 LG반도체가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경기도 이천을 근거로 하는 현대전자(SK하이닉스의 전신)에 ‘빅딜’로 넘어갔을 때와 같은 충격파가 구미에 밀어닥쳤다. 문재인 정부 때인 지난 2019년에는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의 구미 유치를 위해 경북은 물론 이웃 대구까지 힘을 모았으나, 결국 서울과 1시간 거리의 가까운 입지를 앞세운 경기도 용인에 밀렸다.

이 같은 거듭된 실패에서 탈출하기 위해 구미시는 지난 한 해 반도체특화단지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김장호 구미시장을 비롯한 시 관계자들도 이른바 ‘발품행정’을 했다. 구미시 신사업정책과 관계자는 “지난 1년간 대통령실과 국회, 정부 부처를 문턱이 닳도록 방문해 구미의 경쟁력과 반도체특화단지 지정 당위성을 설명했다”고 말했다.

구미 반도체특화단지 추진단장을 맡은 이현권 금오공대 교수는 “당초 특화단지 공모 조건에서 구미는 신청자격조차 되지 않아서 ‘정부가 내건 자격에 반도체 초격차 기술 획득에 필요한 후방사업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이의를 중앙정부 측에 강력히 제기했다”며 “그 결과 처음에는 첨단 전략기술만 대상이었다가 첨단 전략산업으로 범위가 넓어졌고 지원할 수 있게 됐다”고 비화를 밝혔다.

지역 정치권도 두팔을 걷고 나섰다. 구미 출신인 강명구 전 대통령실 국정기획 비서관은 몇 번이고 대통령의 구미시 방문 일정을 기획, 발제하여 윤 대통령이 지난 2월 직접 구미에 내려가 반도체 현황을 살피도록 했다고 알려졌다. 구미에 있는 국립 금오공대 총장을 지낸 김영식 국민의힘 의원(초선, 구미을)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구미는 박정희 정부 때 최초로 반도체 연구가 이뤄진 한국 반도체 발상지”라는 역사적 사실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게 질의를 통해 적극 어필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 소속의 구자근 국민의힘 의원(구미갑) 또한 산업부 주관 사업이니만큼 산업부 고위관료들을 수차례 만나 지원사격에 나섰다. 구 의원은 구미의 반도체 역사와 50년 넘는 IT분야 경험, 노하우라는 특장점을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구미의 기존 산업기반시설 역시 반도체특화단지로 낙점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구미에는 361개의 반도체 소재부품 산업체가 집적되어 있고, SK실트론 등 글로벌 반도체 소재부품 선도기업이 10개사 이상 있다. 이들 앵커기업을 중심으로 3000여개의 기업들이 위치한 내륙 최대의 산업단지를 배후로 효과적인 연계가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 출신으로 국회 반도체 산업 경쟁력강화 특별위원장을 맡았던 한국의희망 대표 양향자 의원 또한 구미의 인프라를 장점으로 꼽았다. “81만평에 달하는 신속 조성 가능한 토지가 있고, 낙동강으로부터 풍부한 공업용수 조달,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가능하다”며 “대구경북통합신공항 조성 시 물류기능 대폭 확대 등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재부품시험평가센터 구축 필요

이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비수도권 유일의 반도체특화단지로 지정된 만큼 구미의 남은 과제는 반도체특화단지를 제대로 잘 조성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기술개발인프라 구축사업을 이구동성으로 꼽았다.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핵심 소재와 부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이에 필요한 장비들을 구비한 제조 테스트베드가 필요하다. 만들어진 소재·부품을 직접 테스트하고 검증할 수 있는 선도기술 연구개발(R&D)센터도 필수적이다.

이현권 금오공대 교수는 “이전에는 최종 칩 생산을 맡은 대기업이 기술보호를 명목으로 소재·부품 수급을 위해 소재부품사와 협력하는 과정에서 기술정보를 공유하는 데 폐쇄적이었다”며 “하지만 앞으로는 미·중 반도체 전쟁 등으로 국내 공급망 구축이 절실한 환경요인을 고려해볼 때 국내 소재·부품 기업과의 긴밀한 협력, 즉 개발스펙의 공유, 개발품 테스트 및 상세 피드백 정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고가의 장비구매와 연구개발센터 구축 등에 드는 비용은 개별 중소기업들이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에 중앙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구미시 관계자는 “시험평가센터 등이 국내 최초로 한 지역에 구비되어 연결된다면 한국 반도체 경쟁력 확보와 기업투자 문제 모두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구미시도 반도체특화단지 관련 사업예산 증대는 물론 5공단의 입주 업종 규제 완화도 반도체특화단지를 키우는 데 필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현권 교수는 “5공단 2단계 지역에는 업종규제로 인해 반도체 업체가 현재로서는 못 들어오고 있다”며 “상수원 보호 구역이라 환경이슈로 규제를 하는 건데, 유해물질 배출이 원천적으로 안 되도록 충분한 처리시설을 구축하는 기술적 대응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주거환경과 교통 등 정주여건 개선 역시 고급 반도체 인력을 확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하이테크 밸리’가 있는 구미 5공단은 오는 2030년 개항 예정인 대구경북통합신공항에서 약 10㎞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에 구미시 반도체특화단지 추진사업단은 구미에서 대구경북통합신공항이 들어서는 대구 군위군을 연결하는 ‘구미~군위 간 고속도로’ 건설도 역점사업으로 추진 중이다. 김장호 구미시장은 “청년들이 구미에서 공부하고 졸업해 지역 기업에 취업하고 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교육자유특구 등 인재양성 기반 조성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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