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000만명이 가입해 ‘제2의 건강보험’이라 하는 실손의료보험은 보험금 받는 절차가 번거롭다. 보험금을 타려면 병원에서 진료비 세부 내역서와 진단서 같은 서류를 받아 보험사에 보내야 한다. 깜빡 잊어버린 서류를 재발급받으러 병원에 가야 할 때도 있다. 병원비가 소액이면 귀찮아서 보험금 청구를 포기하기도 한다. 반면 건강보험은 서류가 병원에서 자동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환자가 서류를 챙길 필요가 없다.
건강보험처럼 서류가 자동으로 병원에서 보험사로 넘어가도록 해서 가입자가 쉽게 실손보험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14년 만에 첫발을 뗐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지난 15일 실손보험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환자가 챙기지 않고 병원이 보험사에 자동 전송하도록 하는 내용의 보험업법 일부 개정안(일명 ‘실손 간소화법’)을 의결했다.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실손 청구를 전산화하라고 권고한 뒤 처음 국회 문턱을 넘은 것이다. 하지만 의료계가 강력 반발하고 있어 앞으로 국회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보험금 지급 느는데도 보험사는 ‘찬성’
실손 청구가 자동화되면 보험사가 지급하는 보험금은 지금보다 늘어나게 된다. 복잡한 절차 때문에 소비자들이 청구하지 않는 보험금(매년 2000억~3000억원 추정)이 자동적으로 지급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보험사들은 실손 청구 간소화를 숙원 사업으로 여기고 있다. 왜 그럴까.
우선 의료계 논리부터 살펴봐야 한다. 의료계는 실손 청구가 간소화되면 심평원 같은 중계 기관에 환자 진료 정보가 축적돼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논리로 강하게 반발해왔다. 환자의 병력 등 민감한 개인 정보가 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정무위를 통과된 법안에서는 의료계 반발을 의식해 청구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환자 정보를 쓰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의료계 반발의 이면에는 ‘밥그릇’ 문제가 있다는 관측이 많다. 진료비가 비싼 데다 병원마다 제각각인 비급여 진료 정보가 쌓일 경우 정부와 보험사가 진료비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추라고 압력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비급여 진료로 수익을 올리는 대다수 병원은 수입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보험사들은 장기적으로 과잉 진료에 따른 실손보험 손실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백내장 수술이나 도수 치료 같은 비급여 진료 비용을 병원별로 비교할 수 있게 되면 병원들이 비싼 비용을 매기기 어려울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의료계 거센 반발이 변수
의료계는 병원에서 서류를 받아 보험사로 보내는 중계 기관이 심평원으로 지정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강력 반발하고 있다. 현재 건강보험 급여 진료비 정보를 총괄하는 심평원이 비급여 정보까지 갖게 될 경우 의료 정보를 통제하는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도 의료계 반발을 의식해 중계 기관을 법으로 규정하지 않고, 향후 시행령으로 정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이번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시행령을 만드는 단계에서 보험 업계와 의료계의 충돌이 예상된다. 정부는 심평원이 아니라 보험개발원을 대안으로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계는 “보험사들이 출자해 설립한 보험개발원 역시 보험사 이익을 먼저 챙길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결국 법안이 어렵사리 첫 관문을 통과했지만, 실제로 소비자들이 편익을 누리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