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정부의 부채한도 상향 협상이 교착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미국의 채무불이행(디폴트) 가능성이 높아지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꼽히는 미국 국채 몸값이 뚝 떨어졌다. 23일(이하 현지 시각) 6개월 만기 미 국채 금리는 2000년 이후 최고치를 찍었고 만기가 6월 초중순인 초단기 국채 금리는 연 6%에 육박했다. 채권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가격은 떨어진다.
미국은 정부가 차입할 수 있는 돈의 규모를 의회가 제한하고 있다. 의회가 부채 한도 조정 권한을 갖고, 한도가 다 차기 전에 통상 한도를 높여준다. 미국 정가에서는 부채 한도를 둘러싼 여야의 줄다리기가 해마다 벌어지는데 이번에는 야당인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이 정부와의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정부의 가용 예산이 소진되는 ‘엑스 데이트(X-date)’가 다음 달 1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부채 한도 협상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엑스 데이트’ 일주일여 앞으로
바이든 정부 하에서 부채 한도를 늘린 것은 지난 2021년 12월이 마지막이다. 당시 미 의회는 31조3810억달러(약 4경2000조원)로 부채 한도를 늘렸는데 지난 1월 이 한도가 다 차버렸다. 미국 재무부는 일부 기금 납부를 중단하는 등 비상 조치에 들어갔으나 역부족인 상황이다. 옐런 장관은 지난 21일 “6월 초, 이르면 6월 1일에 정부의 모든 청구서를 지불할 수 없다고 본다”고 디폴트 가능성을 경고했다.
엑스 데이트 시점이 언제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관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23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워싱턴DC의 싱크탱크 초당적정책센터(BPC)는 엑스 데이트를 다음 달 2~13일로 보고 있다. 미 의회예산국(CBO)은 다음 달 1~2주,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다음 달 7~9일, JP모건은 다음 달 7일로 예상한다. BPC는 “이달 말 미 재무부의 현금 준비금이 위험할 정도로 낮은 수준이 될 것”이라며 “6월 초가 되면 재무부가 날이 갈수록 두께가 줄어드는 매우 얇은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미 국채 몸값 ‘뚝’
엑스 데이트가 다가올수록 미 국채 가격은 약세(금리는 상승)를 보이고 있다. 부채 한도 협상이 결렬돼 디폴트가 발생할 경우 연방정부가 국채 상환이나 이자 지급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3일 6개월 만기 미 국채 금리는 전날보다 0.024%포인트 오른 연 5.361%로 마감했다. 장중에는 2000년 이후 23년 만의 최고치인 연 5.43%까지 오르기도 했다. 만기일이 ‘엑스 데이트’와 맞물릴 것으로 보이는 초단기 국채(T-bill)는 금리가 6%에 가깝게 올랐다. 미 국채는 부도 위험이 극히 낮기 때문에 금리가 낮아도 투자자들이 몰린다. 그런데 디폴트 시한이 가시권에 들면서 미 국채의 인기가 낮아진 것이다.
미 국채 금리보다 일부 우량 회사채 금리가 낮아지는 이례적인 현상도 나타났다. 채권시장 정보 업체인 솔브데이터에 따르면 8월 8일 만기가 도래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회사채는 지난주 연 4%대에서 거래됐다. 23일에는 존슨앤드존슨(J&J)이 발행한 회사채가 연 3.73%에 거래됐다. 투자자들이 미 국채보다 신용도가 높은 우량 기업의 회사채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2011년 디폴트 직전에 극적 합의
미국은 “지금까지 한 번도 디폴트에 빠진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정부가 국채 이자를 제때 지급하지 못하는 등 사실상 디폴트가 발생한 적은 있었다. WSJ에 따르면 1979년 미국 정부는 1억2200만달러의 국채를 적시에 상환하지 못했다. WSJ는 “당시 재무부가 이를 디폴트가 아닌 ‘지연(delay)’으로 규정했다”고 전했다.
가장 최근 디폴트에 근접했던 시기는 2011년 버락 오바마 정권 때다. 당시에도 하원의 과반을 차지한 공화당이 부채 한도를 높여주지 않으면서 디폴트 위기감이 고조됐고, S&P 같은 신용평가사가 미국의 국가 신용 등급을 강등했다. 시장이 흔들리자 미국 정부와 야당은 협상 시한을 이틀 남기고 부채 한도 상향에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