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은행은 외부 규제가 강해 자율성이 약합니다. 그러면서도 규제 산업에서 특권을 누리는 역설적인 상황이 있죠. 금융그룹마다 특색이 별로 없고 경쟁력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집무실에서 만난 김병호(61) 베트남 HD은행 회장은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는 지난 5월 호찌민시개발은행(HD은행) 회장에 취임했다. 베트남의 49개 은행 중에서 외국계 은행을 제외하고 유일한 외국인 회장(chairman)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해외 은행 회장에 선임됐다. 은행장을 외국인이 맡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외국인 회장은 베트남에서도 흔치 않다고 한다. HD은행은 베트남 민간 은행 중에서 세전 영업이익 기준 5위인 중견 은행이다. 지난 10년간 자산 규모는 10배, 세전 영업이익은 30배로 늘며 급성장한 은행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하나은행 전신인 한국투자금융에 입사한 뒤 하나은행장, 하나금융지주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세계은행(WB) 산하 국제금융공사(IFC) 수석고문과 SK 사외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HD은행은 지난해 컨설팅 회사의 조언에 따라 김 회장을 선임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김 회장 선임에 대해 베트남 현지 언론들은 “HD은행의 지배 구조에 국제 표준을 적용하겠다는 은행 주주들의 비전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한국 경제 발전 모델에 대한 베트남 금융계의 관심도 반영됐다. ‘금융계 박항서’로 스카우트된 셈이다.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박항서 감독은 동남아 중상위권이던 베트남 축구를 동남아 최강으로 올려놓으며 베트남에서 ‘국민 영웅’이 됐다.
베트남행은 한국 금융계에만 30년을 몸담은 그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는 “베트남은 여행 한 번 안 가봤을 정도로 낯선 나라여서 망설였지만, 막상 와보니 성장하는 기업의 활기를 느낄 수 있어서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는 매일 아침 호찌민 시내에 있는 HD은행 회장실로 출근한다. “베트남어는 어려워서 금방 포기했지만 그 시간에 그만큼 직원들과 소통하려 노력합니다. 말단 직원도 개인적 고충을 털어놓으려고 회장실을 찾기도 하죠. 상하 구분이 없고 소통에 거리낌 없는 문화가 놀라울 때가 많습니다.” 그는 “베트남 금융 산업의 강점은 개방성에 있다”며 “다른 은행 출신도 꺼리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은행이 큰 틀에서 규제를 풀어주되, 지배 구조나 소비자 보호 같은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만 규제를 적극 적용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 “우리나라 은행은 주인이 없지 않으냐”며 “‘금융그룹의 주인 찾기’가 장기적으로 우리 금융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그전에 제대로 된 감독 체계가 작동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를테면 금융사 회장 선임 과정이 형식적으로는 절차가 잘 갖춰져 있지만, 실제로 이사회 기능이 독립적으로 작동하는지는 별개 문제라는 것이다.
김 회장은 “국내 은행 자기자본순이익률(ROE)이 8%대일 때도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 하나 없는 현실을 뼈아프게 여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ROE는 주주 입장에서는 투자 수익률과 관계되는 수치다. 그는 “베트남은 25%를 기록하기도 하는데 ROE가 한 자릿수라는 건 자본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라고 했다.
그는 “베트남만 봐도 외국인 금융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등 글로벌 시장에서 국적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며 “우리나라 젊은 금융인들은 해외에서 능력을 펼칠 만한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들이 진출할 토대를 닦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