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앞둔 50대 박모씨는 요즘 밤잠을 설친다.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의 전세가가 단기간에 급락하면서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깡통 전세’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지난해 4억5000만원의 전세 계약을 맺었다. 과거 시세에 비해 제법 오른 가격이었지만,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르는 추세였고 실제 매매가도 5억원 수준에서 형성되었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면서 그의 전셋집과 같은 면적인 주위 주택이 4억2000만원에 매매된 것을 알게 됐다. 얼마 전 은퇴 후 여생을 지낼 전원주택의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향후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아 잔금을 치를 계획이었던 박씨는 행여 차질이 생길까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전세 보증금 반환 보증 사고 역대 최대, 깡통 전세 주의보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올해 9월 전세 보증금 반환보증보험 사고 건수는 523건, 사고 금액은 총 1098억원으로 2013년 9월 해당 상품 출시 후 각각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전세 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은 세입자가 보증금을 안전하게 회수하기 위해 가입하는 보증 상품으로, 집주인이 계약 기간이 끝났는데도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면 보증 기관이 대신 보증금을 세입자에게 지급하고, 나중에 집주인에게 구상권을 청구해 받아낸다.
이처럼 보증 사고가 늘어난 것은 최근 금리 인상 등으로 부동산 경기와 전세 시장이 침체되면서 집주인이 집을 팔아도 보증금 반환이 어려운 깡통 전세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깡통 전세는 매매가와 전세 보증금이 같거나 전세가 이하로 시세가 형성돼 전세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보통 집주인의 주택담보대출금과 세입자 전세 보증금 합산 금액이 집값의 80% 이상이면 깡통 전세 위험이 높아진 것으로 판단한다. 일반적으로 경매로 넘어가 한 차례 유찰되면 최저 낙찰가는 감정가의 80%로 떨어지는데, 주택에 대출이 없거나 세입자가 최우선 순위인 경우에 겨우 전세금을 지킬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두 번 이상 유찰되면 감정가가 60%로 떨어지며, 이 경우 전세금을 돌려받기 어려워져 세입자 피해는 더 커진다. 게다가 전셋값이 매매가를 초과하면, 세입자는 전세 보증금 반환보증보험조차 가입이 힘들게 된다.
◇노후 위협하는 다양한 전세 사기
깡통 전세 피해는 갭투자에서 많이 발생한다. 가장 발생 빈도가 높은 사례는 갭투자자의 전세 보증금 반환 능력이 없어 주택이 경매로 넘어가는 경우다. 갭투자는 매매가와 전세가 차이가 적을 때 그 차이(갭)만큼의 돈만 가지고 집을 매입해 시세차익을 노리는 것이다.
최근 서울 강서구, 경기 안산·부천, 인천 등에서 수십에서 수백채에 무자본 상태로 세입자를 모집했다가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전세 사기가 일어났다. 갭투자를 통해 무자본으로 주택을 매입한 집주인이 대출 원금 및 이자를 연체한 경우에도 경매 처리될 수 있다.
세입자가 전세 확정일자를 받기 전 집주인이 대출을 받아 근저당을 설정하는 경우도 조심해야 한다. 전세 잔금일에 세입자가 등기부 등본을 확인하고 전입신고해서 확정일자까지 받았는데도 집주인이 잔금 당일에 해당 주택에 대출을 받아 근저당권을 설정해 버리면 세입자의 순위가 은행 근저당 설정보다 늦게 돼 후순위로 밀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근저당권자의 효력은 당일에 발생하지만, 세입자의 법적 권리는 전입신고를 한 하루 뒤에 발생하는 허점을 노린 것이다. 이를 악용해 전세 잔금일에 주택담보대출을 크게 받고 근저당을 설정한 뒤, 전세금까지 챙겨 잠적해 버리는 전세 사기가 발생할 수 있다.
또 등기부등본상 법률 관계를 꼼꼼히 확인하고 전세 계약을 맺었어도 집주인의 세금 체납으로 전세보증금을 날릴 수 있다. 세금 체납액은 전세보증금은 물론, 은행 근저당보다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이사할 때 임차권등기명령제도 적극 활용
깡통 전세 주택 피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계약 전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다. 반드시 임대 건물의 건축물대장, 등기부등본, 납세증명서 등을 확인해야 한다.
전세 보증금과 부동산 담보로 받은 대출금을 고려해, 가능한 매매가격의 70~80% 미만의 물건을 찾는 편이 좋다. 집주인의 신분증·서류 진위·체납세금 확인도 필요하다. 부동산에 부과된 종합 부동산세, 재산세, 증여세, 상속세 등은 전세 보증금보다 먼저 환수되기 때문이다. 국세청의 ‘미납국세 열람제도’를 이용하면 미납된 국세 유무를 알 수 있다.
둘째로 이사한 날 바로 전입 신고하고, 전세금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전세금에 대한 우선변제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인데, 이를 위해서는 계약 당일 확정일자 및 전입신고가 꼭 필요하다. 우선변제권이란 임차인이 다른 사람보다 우선적으로 보증금을 변제 받을 수 있는 권리다.
마지막으로 임차권등기명령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기 전에 아무런 조치 없이 새로 이사 갈 주소로 주민등록상의 주소지를 옮기게 되면, 임차인이 기존에 주민등록 확정일자를 받아 확보했던 우선변제권이 바로 소멸할 수 있다.
임차권등기명령제도를 활용하면 이 권리를 지킬 수 있다. 임차권등기명령은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한 임차인이 관할 법원에 신청하는 것이다. 법원은 타당하다고 인정되면 임차권등기명령을 발령하고 등기소에 임차권등기를 촉탁한다. 이후에 임차인은 자유롭게 이사를 갈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