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방한한 미국 이동통신사 디시네트워크 창업자 찰리 에르겐 회장이 묵는 호텔 앞에 승용차 한 대가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것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는 부회장)이었다. ‘등산 애호가’인 에르겐 회장에게 산행을 제안한 이 회장은 단둘이 5시간 동안 북한산 등산을 했고, 지난 5월 디시로부터 1조원대 5G(5세대 이동통신) 장비 계약을 따냈다.
삼성 안팎에선 이 장면이 이재용 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한다. 형식이나 의전을 싫어해 국내외 출장에서도 수행원 없이 직접 캐리어를 끌고 다니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직접 발로 뛰며 문제를 해결하는 ‘합리적 실용주의’가 이 회장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이재용 회장은 그의 부친인 고 이건희 회장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것이 재계의 평가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1987년 12월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회장 취임식을 갖고 ‘제2의 창업’을 선언했지만, 이재용 회장은 이날 별도의 취임 메시지조차 없이 ‘조용한 취임’을 했다.
삼성 임직원에게 이건희 회장은 ‘은둔형 카리스마’ ‘엄한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기억돼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은 거의 출근을 하지 않고 이병철 선대 회장의 자택을 개조한 ‘승지원’에 주로 머무르며, 사업의 큰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반면 이재용 회장은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경영의 세부 사항을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이재용 회장이 만들어가는 ‘뉴삼성’의 모습도 선대와는 사뭇 다르다. 이 회장은 지난 2020년 12월 “제가 꿈꾸는 승어부(勝於父)는 ‘더 크고 강한 기업’을 넘어 모든 국민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건희 회장은 국가적 사명감을 가지고 삼성 전 계열사를 세계 1등으로 만들겠다는 주의였다면, 이재용 회장은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 있는 핵심 사업 중심으로 그룹을 재편하는 ‘선택과 집중’ 스타일이다. MZ세대, 워킹맘 등 직원들과 직접 소통하고 사장단과 만날 때도 ‘지시’보다는 ‘경청’을 주로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와세다대 출신인 이건희 회장이 일본 기업에서 다양한 사업 아이디어를 얻었다면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나온 이재용 회장은 유창한 영어와 폭넓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삼성을 이끌고 있다. 2011년부터 무려 7년이나 이어진 애플과의 장기 소송전에서도, 이 회장은 막후에서 스티브 잡스, 팀 쿡과 교류하며 양사 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코로나 백신 부족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직접 ‘모더나’사(社)를 방문해 백신 조기 도입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 회장은 싱글 핸디캐퍼(정규 72타보다 9타 이내로 많이 치는 것) 수준의 골프 실력을 갖췄지만, 국정 농단 사건으로 주요 임원들이 구속되자 “예의가 아니다”라며 골프를 끊고 취미를 등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전국 명산·국립공원 정복’이 버킷리스트다. 중고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를 직접 몰고, 유행 지난 통 큰 정장을 입는 등 소탈한 행보로도 화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