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를 시속 95마일(153㎞)로 달리고 있는 것은 과도한 사고의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30일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서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과 ‘글로벌 리더의 시각'이란 제목의 대담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의 경기 부양책과 그로 인해 발생할 인플레이션(물가상승)에 대한 우려를 쏟아냈다. 그는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초기에 확산을 막기 위해서 국경을 봉쇄하고 그로 인한 재택 생활이 의무화됐을 때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올바른 결정이었다”면서도 “내가 걱정하는 것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상황이 다른 국가에도 전파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가계가 2조5000억달러(약 2800조원)의 저축액을 은행에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3조달러(약 3400조원) 규모의 수퍼 부양책을 실시해 전 세계의 물가상승을 초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서머스 전 장관은 빌 클린턴 정부 시절 재무장관을 맡았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선 경제 정책을 이끄는 국가경제위원회(NEC) 의장을 역임한 세계 최고의 재정정책 전문가다. 현재 하버드 대학교 행정대학원(케네디스쿨)과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 교수로서 미 정부의 재정에 대해 심도 깊으면서도 날카로운 분석을 내놔 미국 정·재계에서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이하 연준)가 인플레이션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며 경고하고 있다.
서머스 전 장관은 이날도 인플레이션의 가속화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연준이 현재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금리를 더욱 빨리 인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인플레이션의 추세나 속도가 연준이 기대하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물가상승률이 연준이 설정해둔 목표인 2%보다 높아지면 금리 인상을 한다고 하지만 금리 인상의 영향은 미국 경제의 일부 부문은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부정적일 수 있다”며 “연준이 어려운 입장에 처해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신흥국들에 미칠 충격을 우려했다. 그는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 금리가 상당히 오르게 될 텐데 신흥 시장은 이런 시나리오에 잘 대비돼 있지 않다”며 “따라서 신흥 시장은 상당한 궤도 이탈 상황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흥국에 투자된 글로벌 자금이 빠르게 미국으로 환류되면서 통화가치가 급락(환율 급등)하고, 정부·기업 등의 달러 표시 채무가 급증하게 될 거라는 뜻이다.
인플레이션은 서머스 전 장관이 향후 국제 경제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는 한 요인에 불과하다. 그는 “경제 전망과 관련해서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지만 부정적인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고 생각한다”며 변이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코로나 감염,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흔들린 국제 질서 등을 불안 요소로 꼽았다.
서머스 전 장관은 “최근 등장한 델타 변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상당히 암울한 전망을 드리우고 있고, 이 변이가 마지막 변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며 “계속해서 더 감염력이 높고 더 치명적인 변이가 나온다면 우리가 지금 내놓은 여러 전망치들이 또 다시 틀린 것이었다고 판명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코로나를 극복했다고 단언하기에는 전 세계 시스템이 충분히 대응할 수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냉전 종식 이후 한 세대 동안 세계 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는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했지만 최근 경제적 민족주의가 발호하고 있다”며 “무역 장벽이 세워지고 이로 인해 경제가 더욱 분열된다면 전 세계 경제 효율성이 저하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경기 부양책과 관련해서도 주의를 당부했다. 권태신 부회장이 “한국은 최근 33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통해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고, 가계 부채 비율은 지난해 기준 GDP(국내총생산) 대비 104%에 이른다”고 통계를 제시하자 “우려할 만한 부분이 있다. 주의 깊게 봐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코로나 대응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는 해야겠지만 코로나와 관련 없는 불필요한 조치는 취해선 안 된다”며 “많은 국가가 코로나를 근거로 삼아서 정부 부채를 필요 이상으로 증가시키는 변명거리로 삼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