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국가 차원에서 디지털 위안화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앙은행이 관리하는 디지털 화폐(CBDC)의 일종인 디지털 위안화는 DCEP(Digital Currency Electronic Payment·디지털 전자결제 화폐)로 불린다. 작년 10월 광둥성 선전에서 CBDC를 시범발행한 중국은 28개 도시에서 수백만명을 상대로 대대적인 사용 실험을 하고 있다. 올 6월1일부터는 디지털 위안화 사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올들어 기업간 시범 거래(B2B)와 도시간 연계 시험, 홍콩과의 역외(域外) 사용 테스트를 마쳤고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때는 더 활성화될 전망이다. 세계 주요국 가운데 속도가 빠르고 규모도 크다. 일각에서는 “향후 10년 안에 전 세계 소비자 결제의 15% 정도가 디지털 위안화로 이뤄질 것”(미국 골드만삭스)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의 이 같은 디지털 위안화 공세 ‘속도전(速度戰)’에는 세가지 노림수가 숨어 있다.
◇①세계 최초 공산당 ‘디지털 감시 국가’ 완성
스마트폰의 전자지갑 앱으로 예금인출과 송금·결제를 하는 디지털 위안화는 중앙은행(인민은행)이 100% 관리해 탈(脫)중앙·분산형인 가상화폐와 다르다. 인민은행은 중국내 은행 계좌나 신용카드 없이 신분증이나 휴대전화 번호만 있어도 쓸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인터넷 접속이 안되는 곳에서도 사용 가능하다. 화폐의 제작·유통 비용을 대폭 절감하고 위조지폐, 자금세탁·탈세 같은 범죄 행위를 원천 봉쇄하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전자지갑에 모든 거래 내역이 남아 있어 당국이 언제든지 개별 금융 정보를 실시간(實時間)으로 파악할 수 있다. 돈에 ‘꼬리표’가 붙어 사용자의 신분, 사용 시간, 장소, 물품의 종류와 수량까지 투명하게 드러나는 구조이다.
여기에다 중국이 가동 중인 세계 최고 수준의 안면(顔面)인식 기술과 감시카메라, 휴대폰 GPS 추적을 연결하면 완벽한 주민 감시 체제가 완성된다. 미국 싱크탱크인 신미국안보센터(CNAS)의 야나 파누지(Yaya Fanusie) 연구원은 “디지털 위안화로 중국 공산당은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결합한 초유의 21세기형(型) ‘디지털 권위주의(digital authoritarianism)’ 국가를 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만사 호프만(Samantha Hoffman) 호주전략정책연구소 수석 애널리스트도 “중국은 사회통제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며 “디지털 위안화는 이를 가능케 하는 마법의 칼”이라고 말했다.
국내 반(反)체제 인사를 탄압해 중국 공산당(CCP)의 영구 지배는 물론 신장위구르·홍콩의 인권 및 민주화 노력을 차단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인민은행은 사정(司正)기관인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데다, 디지털 위안화 사용 한도까지 일방적으로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콩의 금융평론가 우밍더(吳明德)는 “기존의 전자결제는 거래 당사자 사이의 동의가 있어야 거래가 성사되지만 디지털 위안화는 당국이 자유자재로 사용을 통제할 수 있다”며 “특정 물품 결제와 특정 지역에서 사용을 제한하는 등 당국이 전자 코드를 통해 대중의 소비와 기호, 취향까지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②민간 억압하고 국가 부문 키워
스테파니 시걸(Stephanie Segal)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은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 출범을 서두르는 다른 동기는 국내 정치에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알리바바와 텐센트그룹이 주도해온 디지털 경제 구도 재편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두 그룹 산하의 알리페이(支付寶)와 위챗페이(微信支付)는 2019년 기준 189조위안(약 3경2500조원)에 달하는 중국 전자결제 시장의 95%를 차지했다. 10억명의 중국내 사용자와 8000만개의 가맹점을 둔 알리바바는 2300개의 블록체인 관련 특허(세계 1위)도 갖고 있다.
작년 6월 기준 알리바바의 머니마켓펀드(MMF)상품인 위어바오(餘額寶)의 잔고는 2조5400억위안(약 424조원)으로 중국 국영은행들의 일반예금 합계보다 많았다. 민간 IT 대기업들이 개인 소비자 정보와 빅데이터를 사실상 독점해 국가 부문의 권위와 영향력을 위협할 정도라는 평가이다.
이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국영 부문의 방만한 경영과 서비스 부진이 낳은 자업자득이다. 이와 반대로 민간 금융사들은 소비자 요구와 기호에 맞는 기민한 서비스를 적기(適期)에 내놓고 있다. 정부 산하 국유 부문이 자연스럽게 퇴조하는 상황에서 디지털 위안화는 국가의 금융 인프라 장악력을 높이고 민간을 약화시키는 ‘금융 국진민퇴(國進民退)’를 이루는 강압 수단이다.
최공필 한국금융연구원 박사는 “중국 공산당 당국이 작년 10월부터 금융 시장에서 민간 인터넷 대기업들의 영향력 축소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디지털 위안화 도입을 서두르는 것은 결코 우연(偶然)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가상화폐에 대한 중국 당국의 초강경 대응도 마찬가지다. 가상화폐 시장이 활발해질수록, 공산당과 정부 부문의 권위와 위세가 퇴조하기 때문에 발본색원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은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 도입을 서두르는 것은 경제 상황 악화와 서방의 중국 포위 등으로 공산당 통치가 흔들릴 수 있다는 초조함이 표출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③中 ‘금융 굴기’와 ‘중국몽’의 신무기
저우샤오촨 전 인민은행 총재는 올 4월 보아오포럼에서 “디지털 위안화는 국경을 넘는 용도가 아니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 직속 싱크탱크인 사회과학원의 투융자연구센터 황궈핑(黃國平) 주임은 “디지털 위안화 출현을 계기로 국제 통화 및 금융 시스템에서 달러화의 주도적 지위가 약해질 수 있어 위안화 국제화에 동력과 기회가 제공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올들어 중국 인민은행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와 합작법인을 세웠고 홍콩·태국·아랍에미리트(UAE)와 CBDC 사용 시범 사업을 추진했다. 이런 움직임은 디지털 위안화가 단순한 ‘국내용’이 아님을 보여준다.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는 “세계 최초 CBDC 도입으로 중국은 ‘선점(先占) 효과’를 누리는 한편 중장기적으로 디지털 위안화를 위안화 국제화의 신무기로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중국 주도 경제블록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진영에서부터 확산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통화 전쟁(The Currency Cold War)>의 저자인 데이비드 버치(David Birch)는 “중국은 일대일로 참여국가를 중심으로 세계를 디지털 위안화로 연결하는 ‘실크 펄스(silk purse·전자 지갑)’를 만들려 하고 있다”고 했다.
곡물·원유 등 국제 선물(先物) 상품 시장에서 달러 수요의 일부만 디지털 위안화로 옮겨도 달러화의 독보적인 위상은 흔들릴 수 있다.
중국이 SWIFT에서 벗어나 있는 디지털 위안화로 북한, 이란 등과 자금 거래를 하면 미국의 금융 제재와 감시가 무력(無力)화된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런 이유에서 미국 전문가들은 “북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보다 디지털 위안화가 더 심각한 국가안보 위협 요인”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걸음마 단계인 디지털 위안화가 ‘금융 굴기(崛起·우뚝 섬)’와 나아가 중국의 세계 제패를 뜻하는 중국몽(中國夢·Chinese dream)을 앞당기는 ‘전략적 승부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미·중 디지털 화폐 전면전쟁 벌이나
美,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것”
“디지털 위안화가 달러화의 위상을 위협할 경우 미·중간 디지털 화폐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
“미국은 CBDC(중앙은행이 발행한 디지털 화폐) 경쟁에서 (중국을 누르고) 승리해야 한다.” (레이얼 브레이너드 미국 연준 이사)
중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디지털 위안화 총력전을 펴자, 세계 금융 패권국인 미국이 맞대응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 20일 제롬 파월 연준(Fed) 의장이 연준 홈페이지에 이례적으로 영상 메시지를 올려 “올 여름 디지털 달러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밝힌 게 신호탄이다. 미국 연준은 국제결제은행(BIS) 같은 국제기구들과 디지털 달러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다. 보스턴 연준과 매사추세츠공대(MIT)는 다음달 중 ‘디지털 달러 백서’를 내놓을 계획이다.
미국은 민간 금융회사들의 이해 관계와 개인정보 보호 문제 등을 이유로 디지털 달러 추진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미국 학계와 정부는 “디지털 위안화는 달러화 패권(覇權)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라며 중국과의 경쟁에서 “반드시 이기겠다”는 강경론이 득세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위안화가 ‘위안화 국제결제시스템(CIPS)’에 연동돼 사용되면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중국이 2015년 출범한 CIPS에는 97개국 1000여 금융사가 참여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보다 훨씬 미약하다. 그러나 CIPS가 디지털 위안화를 사용하면, 송금에 2~3일 걸리는 SWIFT보다 훨씬 빠르고 저렴하며 위·변조 방지 보안이 뛰어난 강점이 부각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렇게 되면 SWIFT에서 분리된 위안화 중심의 독자적인 국제금융거래 네트워크로 성장하며, 위안화의 국제적 위상도 덩달아 상승하게 된다. 미국으로선 디지털 위안화를 수수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왕휘 아주대 교수는 “디지털 위안화가 달러화의 기축(基軸)통화 지위를 당장 대체할 가능성은 전무(全無)하다”며 “그러나 미국이 세계 금융 패권을 계속 장악하려면 디지털 달러 공론화를 본격화하고 실증실험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