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빡한 LTV(담보대출비율),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에 고가 주택에 대한 ‘주담대 0원’ 규제까지.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며 각종 부동산 대출 규제를 쏟아내 내 집 마련을 위한 대출 길이 막혀가고 있다. 최근에는 “집 사는 데 못 쓰게 하겠다”면서 신용대출 규제도 강화될 분위기다.

그러나 이런 부동산 대출 규제의 ‘무풍지대’가 있다. 회사에서 돈을 빌려다 쓰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을 만지는 부처 산하의 공공기관 직원들이 이처럼 사내 대출을 통해 집을 사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교통부·금융위원회·기획재정부 산하 공공기관 직원들도 ‘영끌(영혼까지 끌어다 쓴다는 뜻의 신조어)’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김상훈 의원

◇부동산 정책부서 공공기관 직원도 ‘영끌’

21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김상훈 의원(국민의힘)이 국토부·금융위·기재부 산하 주요 공공기관 16곳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이들 기관 직원이 사내 복지기금 등에서 주택 구입 용도로 받은 신규 대출액은 지난해 210억3000만원에 달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2017년) 대비 30% 늘어난 규모다.

공공기관의 주택 구입용 사내 대출액은 2015년 140억5000만원에서 2016년 110억9000만원으로 감소했다. 그러다 2017년 162억1000만원, 2018년 205억5000만원, 작년 210억3000만원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에는 상반기에만 174억7000만원을 대출했다. 하반기에도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349억4000만원에 달해, 전년 대비 66% 급증하는 결과가 나온다.

주요 공공기관 직원이 ‘생활안정자금’ 용도로 받아간 대출도 2015년 359억3000만원에서 작년 857억1000만원으로 빠르게 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도 547억8000만원이 풀려, 증가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 돈도 자금 사용처에 별다른 제한이 없는 기관이 대부분이다. 고액 연봉을 받는 공공기관 직원들이 생활고에 쪼들려 빚을 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분석이다. 집 사는 데 보태거나 ‘빚투(빚내서 투자)’ 용도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김상훈 의원

◇사내 대출은 ‘주담대 규제 무풍지대’

서울에서 10억원 짜리 집을 사려고 은행 창구를 찾으면, 최대 대출액이 4억원이라는 답을 듣게 된다. 서울 등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는 무주택자라도 LTV 40% 규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보험사나 저축은행 등 2금융권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부족한 6억원을 메우려 신용대출을 받으려고 하면, DSR 규제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 DSR은 모든 가계대출의 원리금을 갚는 데 드는 돈이 연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뜻한다.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규제 지역에서 시가 9억원 이상 주택 구입하면 차주 단위로 DSR 40%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공공기관 사내 대출은 LTV·DSR 규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시중은행에서 LTV 40%를 채워 대출받고, 모자란 돈을 사내 대출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도 부족하면 신용대출 등을 끌어다 쓰면 된다. 사내대출은 회사와 직원이 각각 채권자, 채무자가 되는 사적인 채권·채무 관계라는 이유로 별다른 규제가 없는 것이다.

김상훈 의원실이 조사한 주요 공공기관 15곳 가운데 주택 구입용 대출에 LTV 규제를 적용하는 기관은 단 3곳에 불과했다. 주택도시보증공사·주택금융공사·수출입은행 등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주택금융공사는 LTV 70%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서울 등 규제 지역에 적용되는 LTV인 40%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금융회사와 마찬가지 수준으로 규제한다는 곳은 수출입은행 한 곳에 그쳤다. 그런데 수출입은행에서는 주택 구입용 사내 대출이 2018~2019년 연속 ‘0원’이다. DSR 규제를 적용한다는 공공기관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금리 수준은 시장금리 수준 대비 훨씬 낮아 ‘특혜’에 가까운 기관이 많다. 조사 대상 15개 기관 셋 중 하나(5곳)에서는 1%대 금리로 돈을 빌려주고 있다.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는 직원들에게 주택 구입용 자금을 최대 1억2000만원까지 빌려주는데, 금리가 ‘기준금리+0.5%’다. 현재 시점으로는 단 1% 금리만 내면 되는 것이다. 대출한도도 적지 않다. 공공기관 15곳 가운데 8곳에서는 대출 한도가 1억원이 넘는다. 최대 2억원(주택도시보증공사)까지 빌려주기도 한다.

김상훈 의원은 “정부의 대출 규제 강화로 국민은 필요한 만큼 대출을 못 받고 있는데, 공공기관 직원에게 더 많은 대출의 기회가 주어지는 건 국민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기관인 만큼, 사회적 통념에 비춰 과도하지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