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을 끌어온 HDC현대산업개발(이하 HDC현산)의 아시아나항공 인수가 결국 무산됐다. 아시아나항공 대주주인 금호산업과 채권단은 HDC현산의 인수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르면 이번 주 중 계약 해지를 통보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전 세계적인 항공산업 침체로 인수를 희망하는 기업이 없기 때문에 아시아나항공은 향후 상당 기간 채권단 관리하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3일 채권단과 항공업계 등에 따르면, HDC현산은 전날 산업은행 측에 “재실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지난달 26일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정몽규 HDC현산 회장과 만나 1조5000억원가량의 추가 지원 방안을 제시하면서 “일주일 내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알려달라”고 한 데 대한 답변이었다. 채권단 고위 관계자는 “이메일엔 명확한 의사 표시 없이 또다시 애매모호한 내용들만 담겨 있었다”며 “최종 담판 뒤에도 답신이 그렇게 왔기 때문에 준비했던 ‘플랜B’(협상 결렬)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왜 이렇게 됐나…코로나 직격탄에 부채 비율 2000%대로 급증
작년 11월 HDC현산은 아시아나항공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된 후 12월 금호산업과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했다. 인수 금액은 2조5000억원이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아시아나 매각 작업은 올해 초 코로나 사태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180도 달라졌다.
아시아나 부채 비율은 작년 말 1795.1%에서 올해 상반기 2366.1%까지 급증했다. 올해 2분기 화물 영업이 선전하면서 234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지만, 상반기 기준으로는 2686억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해 전년 대비 적자 폭이 확대됐다. 산은과 수출입은행은 지난 4월 운영 자금 1조7000억원을 긴급 수혈했다.
이에 대해 HDC현산은 자신들의 동의 없이 자금을 지원해 차입금이 급증했고, 그동안 아시아나 회계 관리가 부실했다는 점을 문제 삼아 지난 4월부터 재실사를 요청해왔다. 그동안 HDC현산 내부에서는 “코로나 불황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돈을 쏟아부어야 해 자칫 HDC그룹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플랜B를 가동한 채권단의 첫 대책은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시장을 안심시킨다는 것이다. 일반 주주들과 채권자들은 물론 아시아나항공에 비행기를 빌려준 리스사들이 불안감 때문에 리스기를 회수하게 되면 상황은 더 악화되기 때문이다. 2분기 기준 아시아나 보유기 81대 중 52대(64%)가 리스기다. 채권단 관계자는 “딜이 무산됐다는 것을 악재로 보고 자금과 리스기를 회수하려는 채권자와 리스사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필요 금액을 넉넉히 2조원까지 보고 있다”며 “정부의 지원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관건이고, 채권자들도 안심한다면 신청 금액은 더 낮아질 수 있다”고 밝혔다. 채권단은 ‘플랜B’ 재원을 기간산업안정기금에서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미궁에 빠진 아시아나항공 운명
이번 인수 계약 무산으로 아시아나항공의 운명은 미궁 속으로 빠졌다. 항공업 불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 새로운 매수자를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금호산업이 지난해 4월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발표한 것도 아시아나가 돈을 벌지 못하는 회사였기 때문”이라면서 “코로나로 인해 글로벌 항공업계 전체가 휘청이고 있는데 새로운 매수자가 빚더미에 앉은 아시아나항공을 사겠다고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는 결국 산은이 기안기금을 지원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출자전환을 통해 아시아나항공을 채권단이 보유하는, 사실상 국유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현재 산은과 수출입은행은 아시아나항공 영구채 8000억원어치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를 주식으로 전환하면 36.9%를 보유해 최대주주로 올라설 수 있다. 대우조선해양처럼 일단 채권단이 아시아나항공을 한시적으로 국유화한 뒤 업황이 개선될 때 재매각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우조선해양은 현재 현대중공업에 인수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의 최대주주인 금호산업도 인수 계약 무산으로 사업 재편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됐다. 금호산업 관계자는 “구주(30.77%) 매각 대금(3228억원)을 받아 신사업에 투자해 미래 먹거리를 개발하려고 했는데 계획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포화상태인 국내 항공업의 판 자체를 새로 짜야 한다고 지적한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교수는 “아시아나항공이 산은 관리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결국 거대한 좀비 기업이 될 것”이라며 “미국·유럽의 대형 항공사들이 합병한 것처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합병해 국제 경쟁력을 키우는 방식까지 고려해 정부가 발전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HDC현산과 금호산업은 아시아나항공 인수 계약금 2500억원을 두고 법적 공방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HDC현산 측은 이를 대비해 김앤장 등 법무법인 조언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